토요일인 어제는 아들 친구들이 우리집에 와서 하루종일 공부도 하고 놀다갔다. 청소년이 된 아들에게 해줄 일이 별로 없어서섭섭하던 차에 나는 저녁이라도 잘 차려서 먹이려고 미리 장을 다 보아두었다.

그런데 돈까스를 튀기려고 하는데 보니까 기름이 좀부족했다. 얼른 배낭을 찾아 매고, 재활용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집을 나섰다. 슈퍼로 가는 길목에 재활용쓰레기 컨테이너가 있기때문에 나는 장에 갈 때도 한 보따리, 올 때도 한 보따리씩 들고 다닌다.

재활용 컨테이너 바로 앞에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다. 삼면이 유리로 막혀있고 지붕이 달려서 추운 날 버스를 기다려도바람막이가 좀 되는 그 정류장의 벤치 위에 침낭과 담요에 쌓여 잠을 자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슈퍼의 카터도 옆에 놓여있는것이 아마도 노숙자일 것이었다. 오늘은 마치 가을 날씨 같다고 약간 시상에 들떠있던 마음이 싹 가셔버렸다. 나처럼 따뜻한 집에서겨울을 나는 사람에게야 이것이 가을 날씨겠지만, 한데잠을 자기에는 춥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손님도 있는데 저녁 시간이 좀 늦었으므로 나는 서둘러서 장을 보았다. 그냥 기름만 사가지고 얼른 집에 가려던 계획이었지만장보기를 싫어하는 나는 한번 슈퍼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되도록 많이 사서 한 번이라도 덜 오려는 욕심이 발동하곤 한다. 그날도내가 들고 갈 수 있을만큼 최대로 다 쓸어넣은 후 2kg 들이 사과봉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것도 들고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사과가 아주 싱싱하고 단단해 보이는 것이 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과일을 잘 먹지 않는 우리 아이들도 이런 사과라면 맛있게 먹을것 같았다. “겨울에는 비타민 섭취가 특히 중요하지.” 나는 사과도 주워담았다.

계산을 하는데 보니까 어제 은행에 다녀와서 그런지 지갑에 돈이 넉넉히 있었다. 10 유로짜리 지폐를 하나 빼서 주머니에 따로 꾹찔러 넣었다. 어제 남편이 우리는 돈을 너무 안 써서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번 크리스마스를 기해서 뭐 가지고싶은 게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하나도 가지고 싶은 게 없어서 좀 민망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였다. “내 대신 저 노숙자더러 돈을쓰라고 하면 되겠네.”

노숙자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돈을 몰래 놓고 가고 싶은데 카터 위에 그냥 올려놓았다가는 바람에 날려갈 것 같았다. “무언가무거운 것으로 돈을 눌러놓으면 좋을텐데… 날로 먹을 수 있는 소세지와 빵을 좀 샀으면 좋았을 걸…” 나는 약간 쩔쩔매는마음이 되어 아쉬워만 하다가 노숙자가 잠에서 깰까봐 그냥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사과봉지가 생각이 났다. “사과는 우리 애들에게도 꼭 필요한 건데. 이 추운 날에 노숙자한테 썰렁한 사과가 반갑기나 할까?“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노숙자에게서 멀어져갔다.

걸어가는데 “노숙자도 비타민이 필요한 거 아닐까? 나도 여행다닐 때 과일이 제일 아쉽던데.“하는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나는 10유로를 주려다가 3유로 짜리 사과가 아까워서 다 그만두었단 말이지? 거 참 이상하고 불합리한 심리네.” 하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집 앞에 다 와서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상하고 불합리한 심리라는 걸 깨달았으면 다시 돌아가서 제대로 해놓고 오면 되지 무슨 고민이람?”

노숙자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10유로를 꺼내서 카터 위에 얹고 묵직한 사과봉지로 눌러 놓았다. 단단한 사과알갱이들이 어둠 속에서 사랑스런 몸짓으로 작별 인사를 건냈다.


(200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