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탱고와 다초점렌즈
4년 전에 우리 부부가 춤을 배우기로 했을 때 사실은 아르헨티나 탱고가 추고 싶었다. 아스토 피아졸라를 좋아하는 우리 취향에 남미의 탱고음악이 맞아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르헨티나 탱고를 잠시 미루기로 하고 3개월짜리사교춤 기본코스에 먼저 등록했다. 우리가(특히 남편이) 그다지 사교적이지못한 까닭에 기본이라도 좀 배워놓으면 어디초대 받았을 때 실례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막상 3개월이 지나고 보니 어림도 없었다. 느린 월츠, 비엔나 월츠, 퀵스텝, 탱고, 슬로우폭스,자이브, 차차차, 룸바, 삼바, 파소 도블레의 열 가지 종류의 춤을 일 주일에 한 시간씩 배워서 3개월만에 어떻게 마스터 한다는건지 말도되지 않았다. 지금 그만 두면 한 달 이내로 전부 잊어버리고 스텝 하나도 건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계속해서배웠다. 스텝과 음악이몸과 머리에 어느 정도 입력이 되면 사교춤을 그만두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운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3년이 흘렀을 때 이제는 그만 배워도 어디 가서 흥겹게 놀 수 있을 정도는 되겠다는 자심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우리는 사교춤의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사교춤은 동작이 격렬해서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보면 어느새 땀이 비오듯 흘렀다. 나이먹으면서 노상 책상 앞에만 붙어 있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 유일한 운동이 되었다. 춤 추면서 우리 부부의 사이도 많이 좋아졌다.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춤 추러가기 전에는 얼른 화해했다.
사교춤을 계속 추면서도 탱고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우리는 1년 전에 아르헨티나 탱고 코스에도 등록했다. 우리도춤이라면 이제 초보자가 아니니 금새 배우리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사교춤의 하나인 유럽식 탱고와는 아주 다른 성격의 춤이다. 유럽식 탱고는 남녀가 허벅지를 맞대고 상체를 활처럼휘어 백합꽃처럼 벌어지는 자세로 행진곡같은 음악에 맞춰서 고개를 절도 있게 따닥 돌려가며 추는 춤이다. 남성이 자유자재로리드하긴 하지만 보통 추는 춤사위가 대략 정해져 있다. 일정한 단위로 미리 외워서 연출하기 때문에 춤사위 또한 화려하다.
반대로 아르헨티나 탱고는 접이식 사다리처럼 남녀가 머리를 맞대고 하체는 떨어져서 추는 춤이다. 약정된 기본동작이 아주 없는 건아니지만 한두 스텝길이로 짧은 까닭에 남성은 거의 즉흥적으로 춤사위를 결정하고 여성은 순간적으로 반응해서 맞춘다. 여성이 남성의 리드를잘못이해하고 다른 동작을 하면 남성이 얼른 거기에 맞춰추는, 즉 두 사람의 즉흥적인 교감에 의해 완성되는 춤이다. 쇼를위해서 특별히 연출할 경우 말고는 춤동작이 화려하거나 섹시하지 않다. 그러나 남녀 사이의 은밀한 교감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에 춤추는 입장에선 대단히 관능적이다.
탱고 음악은 네 소절의 질문과 네 소절의 대답을 끊임 없이 주고 받는 음율로서 구성되어 있다. 음악과 춤동작의 관계가 다른 댄스보다 밀접하다. 애절하면 애절한 대로, 경쾌하면 경쾌한 대로, 음악의 성격에 어울리는 춤사위를 선택하는 고수들의 춤을 보고 있으면 배꼽이 매운 고추를 먹은 듯알알해진다. 그림과 음향과 내용이 딱 맞아떨어져서 야하지 않아도 깊은 감동을 남기는 섹스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 부부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다. 그러나 1년 정도 꽤나 투닥거리며 연습한 끝에 이제는 음악이 박자로서가 아니라멜로디로서 귀에 들어올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남편의 리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스텝을 밟고 있으면 약간 찡찡대는듯 애절한 탱고곡이 어느새 나의 영혼을 100년 전의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로 데리고 날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살던 아르헨티나로 먹이를 찾아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과 시골에서 상경한 빈민들로 바글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또는 근방의 항구도시 라플라타.내 영혼은 밤 바람을 타고 닭장같은 빈민촌을 배회하다가 뒷마당에서 들려오는 반도니온 연주에 이끌린다. 통풍이 안 되어아직도 후끈한 밤 공기 속에 하루종일 혹사당한 피곤한 육체들이 엉켜 열기를 발한다. 서로 맞닿은 이마를 통해 그보다 더 뜨거운감정이 엉키고, 그리고 또 그보다 더 깊은 절망감이 엉킨다. 고되거나 천한 노동으로 또 하루를 죽인 영혼들은 이제 찡찡거리는음악 속에서 자포자기성 휴식을 취한다. 그래도 변치 않는 슬픔을 확인하기도 하고, 부도수표처럼 터무니 없는 희망을 사랑이란감정에 기대어 퍼올리기도 한다. 얼굴을 진흙탕에 쳐박고 비비는 듯한 좌절감과 감미로운 선율과 상대방의 더운 숨결이 어울려탱고라는 새로운 감정을 잉태한다.
감정이 벅차올라 나는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내 눈엔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의 입술이 보였다. 오, 독일에서 온 이민자청년. 온통 이태리 출신의 왕따 속에서 중노동 하느라고 하루가 괴로운, 턱이 하얗고 섬약한 독일 청년. 라인강변에서 자자손손고기를 잡던 어부의 자손. 풍족치 못했던 생활에서도 더 몰락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배를 탔던 청년.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하고 있을까? 과묵한 그가 말은 하지 않아도 나를 갈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독일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넌 누구를 더 사랑하니? 질투가 났던 것일까?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감정이입이 지나치면 진짜로 멀미가 나나? 이 사람이 진짜로 딴 여자 생각하는 거 아냐? 고개를 확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쳐다봤다. 멀미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남편의 눈이 나를 보고 웃었다.
“어이구, 불쌍한 내 마누라. 춤 추면서 남편을 그렇게 우러러보다니. 예쁜 돋보기 하나 사줘야겠다.”
아, 다초점렌즈! 새로 맞춘 안경알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다초점렌즈의 윗 부분은 먼 것을 보는 근시용이고 아랫 부분은가까운 것을 보는 노안용이다. 가까이 있는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안경알의 아랫 부분을 통해 봐야 초점이 맞는 것이고그러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어야했던 것이다.
그래, 돋보기를 쓰면 남편을 우러러보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지 않겠군. 원인을 알고 해결책을 알았으니 나는 다시 신이 나서공상에 빠져들었다. 나비 모양의 빨간 뿔테 안경을 살 테야. 나는 섹시한 돋보기 안경을 쓰고 탱고춤을 출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