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아기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고, 독일에서는 두루미가 물고 왔다고 말한다. 나의 아이들은 이런 소리를 들을 새도없이 곧바로 깨쳤다.

딸아이가 만 세 살이 되어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아이가 식탁너머로 나를 바라보며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외쳤다.

“엄마, 나는 승리자야!"
“오, 그래? 오늘 유치원에서 달리기 해서 이겼어?"
“아니, 오늘이 아니라, 내가 아빠 뱃속에 씨앗으로 있을 적에 이겼어. 나는 제일 먼저 엄마 알에 도착한 정자야."
이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은 자부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성교육을 위한 그림책을 본 것이다. 나는 엄마로서 숙제를 하나 덜은느낌으로 마음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자신은 큰 경쟁에서 이긴 특별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 고마웠다. (미국에 사는 친구의 딸도 비슷한 소리를 한다고 한다. 우리 딸이 특별한 게 아닌가보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가끔 이런 소리를 했다.
“샤힌은 달리기를 못 해. 예전에는 일 등으로 엄마 알에 도착한 정자였는데 과자를 많이 먹고 뚱뚱해져서 그래."
“토마스는 툭하면 잘 울어. 승리자인데도 왜 그럴까?”

생식에 관한 성교육을 유치원에서 자연스럽게 맡아 주었으므로 나는 성폭력을 예방하는 성교육에 치중했다.아이들은 동서양을막론하고, 남녀불문하고, 알게 모르게, 그러나 허다하게 벌어지는 아동 성추행 또는 성폭행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다. 멀리 볼것도없이나만 해도 몇 가지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수치심과 죄의식에서, 나중에는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 아무에게도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비단 나 하나 뿐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이 방면에선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우리의 아이들도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그리고 설령 피하지 못하더라도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심리적으로 미리무장시키는 교육을 해야한다. 심리적으로 미리 무장시킨다는 말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 그런 일이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일에 대한 언어를 준비해주는 일이다. 나는 그런 목적으로 만든 어린이용 그림책들을아동보호단체나 일반 서점에서 구해와서, 아이들에게 차조심, 불조심교육과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읽어주고 대화를 유도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도 간접경험을 통해 실체가 파악된일이라면 아이들은 막상 닥쳤을 때 이를 미리 알아채고 피하거나,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설령 피하지 못하여 불상사가일어난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사후에라도 부모에게 의연하게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혼자서 죄의식을 키우며영혼의 상처로 간직하는 것만 막아도 큰 성과인 것이다.

실지로 그런 일이 우리 아이들이 예닐곱살 때 일어났다. 동네 공원에 놀러갔던 아이들이 또래의 친구들을 이끌고 우르르 집으로들이닥쳤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계속 따라다니며 자꾸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쩐지기분이 이상해서나름대로 조심을 하던 아이들은 급기야 그 사람이 잔디밭에 비스듬히 누워서 사타구니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그림책에서 본, ‘‘꺼림칙한 신체접촉을 원하는 어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아이들은 내게 그 아저씨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집에서 멀지 않은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라고 말했다. 만약에 그 아저씨가 정말로나쁜 사람이면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입기 전에 경찰이 잡아 가둘 것이고, 만약에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경찰에서 조사해보고풀어줄 것이라고 했다. 여남은 명의 고물고물한 꼬마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졸래졸래 걸어나갔다.

이튿날 나를 비롯한 부모들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고, 아이들을 똑똑하게 잘 키웠다고 찬사를 받았다. (아이들은 다시 한번출두해서 사진으로 용의자를 가려내는 작업에 참여했다. 결과는 나도 모른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한반이었던 이웃집 여아가 등교길에 나쁜 놈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담임선생님은 그 아이와부모의 동의 아래 이 사실을 학급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알리고, 다시 한번 교육의 기회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아이는 비록피해를 당했을망정 행동을 잘한 걸로 칭찬을 받았으며 (폭행범이 처음에 수작을 걸었을 때 무시하고 앞만 보며 간 점, 손을 잡고끌고 갈 때 싫다고 말한 점),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인가를 (지나가는 행인에게 큰 소리로도움을 요청할 것, 행인들이 가족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폭행범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쓸 것) 다같이 배웠다.

사건 후 일 년정도 피해자 아이가 혼자 학교 다니기를 불안했을 때, 근처에 사는 꼬마 친구들이 매일 집으로 데리러 가고 바래다주었다.아이들에게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친구의 가방을 들어다 주는 일과 다름 없었다. 도움을 준 아이들은 당연하게 여겼고 도움을받은아이도 수치심은 없었다.

성폭력 예방을 위한 어린이용 그림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끌어안고 쓰다듬고 뽀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원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싫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상대가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친절한 아저씨든, 잘 아는이웃사람이나 가까운 친척이든, 심지어는 엄마, 아빠나 오빠, 또는 친한 친구에게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신체접촉을 거부하는 것은예의에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어딘지 꺼림칙한 비밀은 꼭 지켜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른과아동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동의 입장에선 절대로 잘못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들이 여러가지 일상의 예를 들어쉽게 설명되어 있다.

모두 일리가 있고 수긍이 가는 소리지만 이를 실천하는 교육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런 교육은 아이에게 때로는사회적 통념이나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원칙에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을 실천하려는 부모는아이들에게 너를 사랑하는 어른들을 믿고,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라고 가르칠 수 없다. 그 대신 아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무엇인지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이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고, 때로는 세상의 이목과 부모의 반대를 무시할 수도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서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본인이라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한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의 판단을 부모들이 어떻게 믿어줄 수 있을까? 독일어에 ‘‘머리로 하는 결정'‘과 ‘‘배로 하는결정'‘이라는말이 있다. 이성으로 하는 결정과 감정을 앞세운 결정이란 뜻이다. 아이들은 주로 배로 결정을 내린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어른인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 딴에는 머리를 쓴다지만 결국은 느낌이나 감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다.머리에서 나오는 끝말이어가기식 논리는 단편적이어서 당장에 주장하기는 명쾌하지만 두고두고 께림칙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느낌과감은 당장에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남 보기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총괄적인 성격이라고 나는 믿는다. 느낌과 감에는경험과 기억, 잘 되고자 하는 인간적 본능, 진화론에 입각한 인류의 지혜가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내 말투가 갑자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웅변조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몰라서가아니라 알아도 내 인간성과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실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한 것도많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완벽하지 못한인간들이 나오는 것 또한 세상의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나는 근본적인 교육관에만 신경을 쓰며 정작 실질적인 성교육은 유치원에서 다 해결해준 줄 알고 방치했다. 그러던 어느날 만열 살이 된 딸아이가 강아지를 사 주던지 동생을 낳아 달라고 조르다 말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랑 아빠는 매일 한 침대에서 자는데 왜 아기가 안 생기지?"
“그냥 옆에 누워서 잔다고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니야."
“알아, 서로 사랑해야 해. 엄마 아빠는 서로 사랑하잖아?”

독일어에서는사랑한다는 뜻의'‘리벤(lieben)이 성교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딸은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적나라한 그림을 보았어도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만큼만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진상을 알게된 나는 딸아이보다 세 살 더 먹은 아들을 봐서라도 그 기회에구체적인 성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사랑한다고 아빠 정자가 엄마 알로 들어오는 거 아니야. 아빠 페니스가 엄마 질로 들어와야 하는 거야.”

딸아이는 여자 몸 안으로 무엇이 들어온다는 말에 얼굴을 찡그리며 얼른 제 오빠를 쳐다봤다. 아들은 벌써 다 안다는 표정으로빙글빙글 웃었다. 뒤이어 딸은 제 아빠에게 흘끗 힐난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동정어린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안 아파?"
“아니, 기분 좋아.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니까 안 아프게 하고, 그러면 둘 다 기분이 참 좋아.”

나는 기회다 싶어서 콘돔을 가져와서 포장을 뜯어 보였다.
“이것 봐. 아빠가 콘돔을 페니스에 끼우고 엄마 몸에 들어오면 정자가 콘돔에 갇혀서 엄마 알에 도착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아기가 생기지 않는 거야.”

딸은 그제서야 그간 수많은 승리자들이 부모의 농간에 의해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원통해했고, 소중한 정자들이 갇힌 콘돔이쓰레기통에 함부로 버려진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다음에는 버리기 전에 자기에게 먼저 보여달라는 둥 꼬치꼬치 캐묻고 요구하여목석같은 제 아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일에선 십대 중반의 청소년들이 이성친구를 사귀면 성교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십대의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임신의 위험에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다. 내 딸 친구의 엄마인 독일여성이 하루는 내게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만 열세살이 된우리 딸들에게 콘돔사용법을 실지로 연습시키자는 것이었다. 임신과 감염으로부터 지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파트너에게 일임할 게 아니라,소녀들이 적극적으로 콘돔을 지참하고 다니며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혼모로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크게 공감하여 우리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하지만실습용 모델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난감한 현실에 봉착하여 우리의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플라스틱 모형을어디 가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닌데 그렇게 동네방네 찾아다니게 되지 않았다. 딸아이는 제 아빠를거론했지만, 북독의 청교도적 가정에서 자란 나의 남편이 들었으면 기절할 일이다.)

그러고도 2년이 흘러 딸이 만 15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딸이 몸이 좀 불편하다며 내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내가방에 무엇을 가지러들어갔더니 심심했던지 말을 걸었다. 자기는 사람의 몸에서 왜 유독 음모와 겨드랑이 털만 퇴화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도침대에 들어가 키가 나만한 딸아이를 끌어안고 곰곰생각해 보았다. 혹시 냄새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땀을 유발하고 보존하여 체취를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사람의 몸에서 털로체온을 보호하는 기능은 이미 오래 전에 무실해져서 퇴화되었지만, 체취로써 이성을 끄는 기능은 아마 최근까지도 유용했던 것아닐까? 우리의 테마는 자연스럽게 종족보존, 이성교제,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딸이 내게 물었다.
“아참 엄마, 그때 미리암 엄마랑 우리한테 콘돔 사용법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 언제 할 건데?"
“글쎄, 그건…모델이… 근데 갑자기 왜?"
“내가 아직 남자친구가 없잖아? 그래서 미리 배워 두려고. 나중에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그때 가서 엄마한테 물어보면 엄마가의심할까 봐그래."
“남자친구가 생기면 엄마한테 소개 안 해 줄 거야?"
“소개해 주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어느 선까지 갔는지는 비밀로 하고 싶을지도 몰라."
“그래, 그렇겠구나.”

또 어디 가서 이놈의 모델을 구해오나 고민하던 나는 냉장고를 뒤져 당근 봉지를 꺼냈다. 그 중에 약간 작은 듯한 놈으로 골랐다.너무 크면 딸아이가 보고 쇼크를 먹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나중에 남자를 만났을 때 고지식하게 당근보다 작네 어쩌네하며 남의 집 귀한 아들을 기죽이면 큰일이겠다 싶기도 했다.

사실은 나도 콘돔을 내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어서 서툴기도 했지만 당근이 작아서 시범을 보이는데 콘돔이 술술 그냥 빠졌다.콘돔을 몇 개나 버리며 쩔쩔매다가 실지 모델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변명하는 나를 보며 딸아이는 아주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콘돔만으로는 불안하니 피임약과 콘돔을 같이 써야겠어."
“제대로 사용하면 안전해. 콘돔을 쓰면 피임약은 필요 없어."
“아니야, 엄마. 그러다가 임신하면 내 인생은 망치는 거야."
“피임을 제대로 했는데도 임신이 된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야. 네 잘못이 아니라구. 그리고…”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서 네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건 없어."
“엄마는? 공부도 안 끝난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임신하면 인생 망치는 거지.”

펄쩍 뛰는 딸에게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임신해도 인생 망치는 거 아니야. 불편하긴 하지만 괜찮아. 넌 아기 기르면서 공부할 수 있어. 엄마 아빠도 성심껏 도와줄거야."
“괜찮지 않다니까 그러네. 난 지금 공부하고 인생을 즐기는 나이란 말이야. 아기는 나중에 낳아서 즐길 거란 말이야. 엄마는 자기 일이아니니까 그러지. 엄마는 자기가 지금 잘 살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내 입장은 다르단 말야. 엄마는 내가 지금 몇살인지알기나 해?"
“아이고 귀청이야. 누가 너보고 임신하래?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인생 망치는 건 아니라고 그랬지 누가 너보고 임신하랬니? 괜히나한테 소리지르고 야단이야."
“소리는 지금 엄마가 지르잖아!”

그 후로 딸아이는 엄마 말을 듣다간 자기 인생을 망치는 수도 있으니 스스로 알아서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눈치였다. 이에피소드를 딸 가진 독일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모두들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나를 칭찬했다. 자기네들도 이렇게 반어법을 써서딸들에게 임신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어 스스로 더욱 조심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속으로 생각했다. ‘‘어어, 아닌데. 그 반대인데. 난 임신의 공포심을 심어주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단 한번의 사건으로 인생을망치는 일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독일에서 미성년자가 임신을 하면 동네방네 입방아에 오르는 건 사실이다. 시어머니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이웃집 소녀가 15살에아기를 낳았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그 얘기로 꽃을 피웠다. 우리도 시댁에만 가면 하루에도 열 번 이상 그 얘기를들었다. 언젠가 시어머니께서 그 이웃집에서 당신과의 왕래를 딱 끊었다고 내게 하소연을 하시길래 내 입에선 “아휴, 당연하지요. 저라도그러겠어요"라는 말이 나도 몰래 툭 튀어나왔다. 딸아이도 할머니 집에만 가면 쉴 새 없이 이웃집 소녀에 대한 험담을 들은 것이무언의 폭력으로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한창 크는 중인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마음은 만국공통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혼전성교 자체는 아무런 테마가 되지않는다. 법적으로 성인인 18세만 넘으면 그런 개인적인 일로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부모들도 자식의 애인의 자질을 트집잡기는 해도 성생활에까지 간섭하지는 않는 게 정석이다. 미국에서 혼전순결 서약운동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은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국과 독일 간에 고등학교 교환학생을 주선하는 단체에선 미국에 갈 학생들과 부모들을 상대로 독일과 다른성문화에 대해 알려주고 콘돔을 독일에서부터 꼭 지참할 것을 당부한다.

만 16세가 되자마자 딸은 방학을 이용하여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를 공부하러 갔다. 딸아이가 짐을 쌀 때 내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집에 콘돔 어디 두는 줄 알지? 엄마 아빠는 그것 숫자 세어보지 않는다."
“응, 내가 생각해 보고 어쩌면 가져갈게. 설마 거기서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겠어?"
“그래도 생각해 봐. 사람 일은 모르니까. 미국에선 미성년자들이 콘돔을 아무데서나 구할 수 없다잖아.”

잠시 후에 내가 딸을 껴안고 약간 징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렇게 잠시 사귀고 너랑 자자고 그러지는 않을 거야."
딸이 아주 너그러운 목소리로 나를 다독거렸다.
“나도 엄마 마음 알아. 나는 경솔하지 않아.”

혼자 미국에 간 딸에게서 연일 즐거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간혹 데이트도 하는 모양이었다. 남은 가족셋이서 저녁을 먹으면서 딸 얘기를 하다가 아들이 농담을 했다.
“미국 남자들은 안전섹스에 서툴다고 들었는데. 갈 땐 하나였는데 올 땐 둘이 돼서 오는 거 아냐?”

다같이 웃다가 남편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집 부모들은 걔가 혼자서 씩씩하게 멀리 떠났다고 부러워해. 우리 보고 딸을 잘 키웠다고 칭찬하는데 애가 그렇게 되서돌아오면 다들 뭐라 그러겠어?”

나는 갑자기 시어머니 얼굴이 오버랩되어 톡 쏘아붙였다.
“뭐라 그러긴? 그럼 어때서?”

남편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 그걸 말이라고 해?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 애의 인생은 어떻게 되고?"
“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 텐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도없잖아.”

남편은 화를 낼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더니 결국 “그래, 당신 말이 맞아.“하고 대답했다.

뒤이어 우리 부부는 공부를 마치고 임신과 육아를 하는 여성의 경우와 일찌감치 아이를 가져서 다 키우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끝나자마자 중단 없이 취업전선에 매진하는 여성의 경우를 비교해보았다. 사회적 통념을 떠나서 보면 어느 것이낫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문득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 어떻게 생각해? 지금 우리 집안에 실수로 아기가 태어난다면 내가 낳는 게 더 큰 불행일까, 딸이 낳는 게 더 큰불행일까?”

남편이 금방 대답했다.
“당신이 낳는 거.”

내가 배실배실 웃으며 다시 물었다.
“왜? 난 공부도 끝났겠다 게다가 결혼한 여자잖아?”

남편의 대답이 망설임 없이 나왔다.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웃으면서 “그치? 그치?” 하고 맞장구를 쳤다.

딸아이는 미국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홀몸으로. 몸은 여전하지만 마음은 그새 훌쩍 커버린 딸이 콘돔을 우리 침실에 도로 갖다 놓으며 나를 보고 찡긋 웃었다.



PS 1: 이 글을 써도 된다고 허락해준 딸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던 자신은 십대의 임신에 절대로 동의하지않는다는걸 다시 한번 강조하라는 단서를 붙였다.

PS 2: 얼마 전에 미국에 사는 친구의 블로그에 갔다가 기겁을 했다. 그집 딸도 자기가 승리자니 정자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늘이 노래져서 진작에 써놓은 이 글을 발표해야 하나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한참 지나서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얘기했더니 막 웃으며 자기도 내 글을 읽고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걸 그제서야 고백했다. 고민하지 말고 글을 올리라고 적극적으로 종용한 친구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