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궂어서 지하철을 타고 모모를 돌보러 가는 길이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서 영혼은 딴 데 가있고 내 몸만 에스칼레이터를 타고올라가는데 내 앞에 서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할머니는 이미 나를지나쳐 뒤로 넘어지며 밑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 거구나. 내 앞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내 머리속에는 구급차, 병원, 묘지가 차례로 떠올랐다.

이때 난데없이 배구가 생각났다. 공이 어찌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몸을 날려 팔부터 뻗고 보는 동작. 그러다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공을 제대로 받아내는 일이 간혹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떨어지는 할머니를 향해서 무조건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도 혹시 내가 지금 판단을 잘못해서 멀쩡한 사람의 멱살이나 엉덩이를잡는 꼴불견을 연출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잡다한 생각들, 즉 체면에 대한 생각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나는 무시했다. 내가 멀쩡한사람의 멱살 아니라 머리끄댕이를 잡아 망신을 당한다해도 우선 모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내 손에는 할머니의 외투자락이 잡혔다. 보기에 육중했지만 할머니는 의외로 가벼웠고, 거의 바닥에닿을 듯 기울었던 할머니의 몸이 내 팔의 힘으로 다시 세워일으켜졌다.

할머니는 다시 내 앞에, 나는 그 뒤에 서서 에스칼레이터를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에스칼레이터를 벗어나자 할머니가 몸을 돌리더니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도 정중하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했다. 돌아서서걸어가는 내 망막에 할머니의 상기된 표정이 뒤늦게 박혔다. 아, 정말로 일어난 일이었구나.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때 내가 할머니를댁까지 모셔다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그날 저녁에서야 떠올랐다.

살다 보면, 소용 없어도, 망신을 당해도, 무조건 손을 내밀고 봐야하는 상황이가끔 일어난다. 공이 손에 맞든 안 맞든, 손 내미는 동작을 취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부끄러울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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