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남편이 커피 끓이러 부엌에 나간 사이에 만 17세인 딸애가 내 침대로 쏙 들어와 누웠습니다.

나: 우잉, 방학인데 왜 벌써 일어났어? 어제 늦게 들어왔잖아?
애: (심각하게) 엄마, 나한테 문제가 하나 생겼어.
나: (으악! 마초 쫓아다니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애: 이달 용돈을 벌써 다 써버렸어.
나: (휴우, 살았다. 그까짓 돈!) 에그, 이제 15일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또 옷 샀냐?
애: 아니, 아니야. 특별히 산 것도 없는데 흐지부지 썼나봐.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나 집안 청소해서 돈 좀 벌어도 될까?
나: (교육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신이 나서) 그래, 그래라. 청소할 거 많아. 돈 많이 벌어라.
애: (내 목을 껴안으며) 엄마, 고마워. 엄마가 없으면 나 어떻게 살지?

오늘 저녁에 친구들과 춤추러 가기로 했는데 자기는 돈이 없어서 어쩌면 못 갈지도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한 남자애가자기가 내준다고 하길래 그건 사양했다고 하네요. 나는 딸애 엉덩이를 마구 치며 칭찬해줬지요. 그래, 그래, 사람이 돈에 팔리면안 돼.

나: 어제 “그 애”도 나왔든?
애: 응, 그런데 이젠 내 사랑이 식는 중인가 봐. 인젠 걔를 봐도 배가 간질거리지 않아.
나: 속은 편하겠구만?
애: 그래.
나: 그러다가도 걔가 너한테 잘해주면 또 확 불 붙는 거 아냐?
애: 그럴지도 모르지. 외형적으로 완벽한 애니까.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근육질에 키 크고 목소리 굵고 어쩌고 저쩌고 자랑하는데 아마 마초 티를 줄줄 흘리는 것 같음)
나: 걔 담배 피우지? 니 아빠 알면 큰일 나겠다.
애: 아빠도 알아.
나: 뭐? (앗, 혹시? 이 인간이 설마?)
애: 이자 강변에서 우리가 노는 거 봤대.
나: (아으, 이 인간이 진짜! 애한테 그 얘길 하면 어떡하냐? 쪽팔리게.)

딸은 요즘 매일 저녁에 이자 강변 다리 밑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놀아요. 매일 화장하고 이옷 저옷 입어보느라고 방을 엉망으로어질러놓고는 나가서 자정이 되어야 들어옵니다. 다 큰 애들이 강변에 앉아서 대체 뭘 하고 노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던 차에 그것을훔쳐볼 기회가 왔지요. 올해는 뮌헨이 생긴지 850년 되는 해라서 도시 곳곳에서 연일 이벤트가 있었는데, 불을 휘영청 밝힌 다리축제도 근사하게 열렸습니다. 뮌헨의 역사는 이자강의 다리에서 시작됐거든요. (역사 공부는 나중에.) 아이들이 나가버린 심심한저녁에 우리 부부는 축제를 핑계삼아 다리로 나갔습니다. 다리 위에서 고개를 빼고 이자 강변을 휘휘 내려다보니 그 많은 인파 중에내 딸이 딱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isarbr2\_15.jpg

청소년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는데, 뭘 하고 노는지 참 심심해 보이더군요. 남자애들은 하나같이 담배인지 뭔지를 손으로 말아서 폼 잡고피우고 여자애들은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우아하게 앉았어요. 남녀 행동의 패턴이 딱 정해진 게 도무지 부자연스럽고 불편해보이데요. 겉멋만 잔뜩 들어 도토리 키 재는 신흥부자들의 파티 분위기가 저럴까?

나: 아으, 쟤네들 뭐하는 거야? 왜 젊은 애들이 저렇게 노냐? 보기 민망하네.
그: 저노무 시키들은 왜 하나같이 다 담배를 피우는 거야? 어떤 놈이 그 놈이야?
나: 그놈이 그놈인데 어떤 놈이 그놈인지 알 게 뭐람? 악, 저기 병나팔 부는 애, 저거 우리 딸이야. 망할노무 지지바, 술 마셔?
그: 어디, 어디? 저 애? 에이, 물이겠지.
나: (남편한테 혼날까봐 속으로만 생각함) 친구들이랑 같이 마신다기에 술 남은 거 줬더니 저 혼자 다 마시고 있어. 다시는 주나 봐라.

그때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시침을 뚝 뗐지요. 부모 체면에 몰래 가서 봤다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글쎄 이 영감탕구가그걸 애한테 벌통내다니. 내가 집에 없을 때 애들이랑 함께 요리하면서 그 얘기를 했다는군요. 딸이 저녁 먹고 또 나갈 거라고 마늘 많이 넣지 말자고 하니까 남편이 그러더래요. 니가 만나는 남자애들은 다 담배 냄새를 피우는데 너는 마늘 냄새 좀 나면 어떠냐고.딸이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나랑 다리 위에서 봤다는 얘기까지 실감나게 했다는군요. 그래서 오늘 아침 먹으면서 제가 따졌습니다.

나: 우리가 다리 위에서 몰래 봤단 말을 애한테 하면 어떡해? 부모 체면에 창피하잖아.
그: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나?
애: 어른들이 주책이셔. 이젠 미행까지 하고.
우리: (부부 합창)아냐, 우연히 봤어.

음, 근데 우리 남편이 까맣게 잊어버린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는 담배 피우는 여자랑 결혼했다는 사실. (지금은 끊었지만)

오늘의 역사 공부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뮌헨은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독일 여느 지역과는 달리 남방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도시에는 인간이 만든볼거리 또한 많다. 그런 이유에서 세계 각지로부터 관광객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여름철이 되면 시내 도처에서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허허벌판에 수도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어, 수도사라는 뜻으로 ‘무니헨’이라 불린 이 장소가 역사의 장이 되기 시작한 것은12세기이다. 이 지방을 하사받아 새 주인이 된 영주가 이웃 영토에 있는 다리를 몰래 불태워버리고 그 대신 몇 킬로미터 떨어진자기 영토, 수도원 부근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했다.

isarbr15.jpg 최초의 다리는 남아 있지 않지만 뮌헨에는 아름다운 다리가 많다.

옛날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를 연결해온 무역로는 이자 강을 건너는 다리를 통해 이어졌으므로 무역상들은 불가불 새 다리를 이용하는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다리통행세라는 제도가 있어 영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무력으로 쟁탈한 셈이었고 덕분에 나날이부강해졌다. 이것이 일개 수도원이었던 뮌헨이 훗날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로 자리 잡게 된 계기이다.

알프스 산맥의 계곡에서부터 물을 모아 도심을 통과하는 이자 강은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부드러운 초록빛을 띈다. 강변을따라 수면에 커튼처럼 머리를 드리운 수목과 하얀 자갈밭이 이어진다. 야외를 유난히 좋아하는 뮌헨 주민들은 해만 났다 하면강변으로 모여들어 일광욕을 즐긴다. 여름이면 거리를 메우는 관광객들이 다리 위에서 구경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라당 다 벗는사람도 있다.

저녁이 되면서부터 강변 자갈밭 중 일부 허용된 구역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를 구워 먹는 무리들로 붐빈다. 해가 꼴딱 넘어가기전에 자신이 초대받은 파티의 주인을 찾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며 놀다가 이튿날 아침 동이 터서야 생판모르는 사람의 술과 고기를 축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다시 쓰기 뭐해서 제 책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의 “마을 같은 도시 뮌헨”에서 발췌했습니다. 한겨레출판사 분들, 용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