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은 빈부격차가 심한 도시고요,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보리스 베커(왕년의 테니스 스타)가 살던부자 동네랑 가까워서 무섭게 돈 쓰는 사람들을 좀 접했네요. 그런 집 아이들은 부모랑 똑같이 돈을 뿌리고 다니지요.

더 무서운 건그렇게 돈이 많지 않은 부류들도 빠지지 않으려고 덩달아서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거랍니다.

우리 아들은 워낙 남편 붕어빵이라 제멋대로 삽니다. 학급에서 유일하게 핸펀 없는 아이, 시계 없는 아이(지난 생일 날억지로 하나 사 줬음), 머리에 젤 안 바르는 아이랍니다. 그러면서도 교우관계도 좋고 교내, 교외활동도 활발해서 우리 부부는 내심흐믓해하고 있었죠. 거 봐라. 테레비, 자동차 없이 키워도, 바지 기워 입혀도,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휴가 다니지 않고 자전거로텐트 여행을 해도 저렇게 떳떳하게 잘 크지 않냐? 아니, 혹시 우리가 그래서 아이가 저렇게 된 건 아닐까나? 역시 우리는잘났어. 홍홍홍.

그런데 둘째인 딸아이가 크면서 저희는 다시 겸손한 부모로 돌아와야 했어요. 아이가 열두어 살이 되었을 때 명품타령을 하는데 처음엔저것이 정말 내 딸인가 싶더군요. 어쩐지 몸매가 후리후리한 거 보니까 아무래도 시어머니 닮은 모양이야. 지 할머니 닮아서 머리가나쁜 건 봐줄 수 있겠는데 우찌 남의 시선에 부화뇌동하는 성격도 닮았을까? 으아아악.

딸아이가 나와는 다른 객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아이는 우리와는 다른 인생을 살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않았어요. 그러나 자식의 성향을 인정하는 것과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르쳐야 하는 일을 구분하는 일이 참 어려웠어요. 오래 고민하고의논한 끝에 우리는 이렇게 했습니다.

‘‘멋부리는 거, 용돈을 몽땅 옷 사는 데 쓰는 거는 자유다, 그러나 명품은 절대로 안 된다. 왜냐면 자기가 일해서 번 돈이아니기 때문이다. 어른이 자기 돈으로 명품 사는 건 라이프스타일에 해당하는 거라 남이 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의세계에서 명품으로 승부를 보자는 것은 부모의 실력에 따라 우열을 가르자는 소리다. 그건 불공평하고 부도덕한 일이라 우리는 절대로동조할 수 없다.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서도 우리같은 중간계층이 굳건해야 한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계층은 극소수의 부자층이 아니라 부화뇌동하는 중간계층이다. 우리 중간층이 흔들리면 극빈층은 더욱 갈 곳이 없어진다.

또 하나 명품 반대의 이유. 너희는 지금 한창 미적 감각을 키우고 자신의 매력을 발견해야 하는 나이이다. 명품 딱지 하나만붙이면 세련된 걸로 착각하는 습관이 붙으면 독창적인 감각을 개발할 능력을 잃는다. 명품 하나 살 돈으로 여러 벌의 옷을 사서이리저리 코디하며 옷 잘 입는 법을 연구하는 것이 한창 크는 아이들에게 훨씬 이익이다. 명품은 나중에 고유한 미적감각을 개발하지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 사도 된다. 그건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여기서 우리 남편이 뭐라고 변죽을 올렸는지아세요? 니 엄마를 봐라. 명품 없어도 얼마나 세련되게 옷을 잘 입는지. 저는 남편이 농담하는 줄 알고 같이 하모하모 그랬는데어흑, 알고 봤더니 이 사람 진담이었어요. 아이들이 착해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론 얼마나 우스웠을까나?)’’

그리고는 딸아이의 용돈을 파격적으로 올려주었지요. 지 오빠와는 달리 딸아이는 벌써부터 혼자서 옷을 사러 다니거든요. 예전에는돈을 많이 주면 함부로 쓸까 봐 빠듯하게 주었는데, 항상 돈이 딸릴 때는 돈만 생겼다 하면 쓸 궁리만 하더니 이제 넉넉하니까오히려 계획을 잘 세워서 더 알뜰하게 쓰더군요. 명품은 정말로 안 사요. 애들은 늘 크는 중이니까 그새 철이 들어서 우리 말을알아들어서 그런 면도 있고, 이제는 같은 돈으로 윤택하게 사는 법을 터득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다 지나간 일이라 이렇게 몇문장으로 요약이 되지만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어제는 제가 딸아이 침대에 들어가서 아이를 껴안고 물어 보았지요. 너 행복하니? 아이는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자기는 운이 좋은나라에, 운이 좋은 시대에, 운이 좋은 가정에 태어나서 운 좋은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가끔 다른 소리도한답니다. 사실은 자기가 보통 사람인데 이상한 집안에 태어나서 가족들에게서 되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요. 말은 맞지않나요?

올해 저의 목표는 크리스마스 때 딸아이 테레비 사 주는 겁니다. 남편이랑 한참 다퉈야 해요. 그런데 아들아이가 지 애비보다 더펄쩍 뛰면서 테레비 반대를 하네요. 우리가 테레비 없이 아이들을 키운 건 우리가 아이들을 품에 안고 업어서 키웠던 것 만큼이나우리 스스로 좋게 평가하고 있는 점이랍니다. 그러나 이제 제 앞가림을 곧잘 하는 만 열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테레비를 갖기를원하는데 이를 거부하는 것은 부모의 횡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컴퓨터 게임을 과하게 하지 않도록악착같이 감시하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유도한 건 부모로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아이들의 판단능력을 믿어줘야 하는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의 신념만을 고집한다면 아이들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오늘 아침에 한 반쯤은 성공했네요. 제가 남편한테 이렇게 말했거든요.

나: 당신은 지금 당신이 부모님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 그래.
나: 우리 아이들도 우리보다 나은 인생을 살게 되겠지?
그: (침묵. 어쩜 그는 우리보다 나은 인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름.)
나: 우리는 우리가 옳다는 생각에 갖혀서 우리의 한계를 넘을 수 없지만 우리 아이들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해. 아이들은앞으로 자기들이 살아야 할 세상이 어떤 건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우리가 그걸 가르쳐 줄 시기는 이제 지났어.
그: (의심의 눈초리. 뭔지는 몰라도 넘어가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림.)
나: 그 애가 테레비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거야. 우리가 이유를 모른다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잖아? 그 애는 지금 잘하고 있잖아?
그: 뭐가 잘 해? 내가 보기엔 아직도 아슬아슬한데?
나: 내가 보기엔 그 애가 우리보다 잘하는 것도 많아. 당신 안경으로는 보이지 않는 색깔이라서 그렇지. 아이들은 우리보다 나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부 다 판단하려고 들면 안 돼.
그: 당신 확신해? (나중에 일이 안 되면 나한테 책임지우려고 눈빛이 결연함.)
나: 응. (속으론 자신이 없지만 겉으론 씩씩하게. 막 우기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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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딸의 나이 만 15세였던 2005년 12월에 쓴 글입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테레비 비슷한 걸 샀습니다. 좁은 집에 테레비 놓을 자리가없어서 기존의 컴퓨터에 뭘 연결해서 보는 건데 그게 얼마나 복잡한지, 또 작동방법이 수시로 변하는 바람에, 저는 테레비 켤 줄을몰라서 혼자서는 절대로 못 봅니다. 그래서 북경올림픽 개막식도 못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