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 일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의 마지막 장 “현장이야기”의 마지막 글 “상식과 호기심과 상상력”에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 계셔서 한국책을 구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그 부분을 발췌해드려요. 한겨레출판사 분들! 부디 용서해주셔요.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 (334 - 336쪽)에서.

상상력이 학문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학자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떠난 후에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칼스루에 주택에 관한 연구를 마치고 나서 한 일은 문화재 건물을 조사하여 도면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학계에서 그다지 고급으로 쳐주지 않는,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3D업종이었지만 내 적성에 딱 맞았다. 나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내가 잘하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대부분 철거나 보수 허가가 난 문화재 건물을 도면으로 남기는 일이어서 나는 마지막 증인이라는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발견해서 남기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순수한 연구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하자니 늘 시간에 쫓겼다. 인부들이 내 발뒤꿈치를 바짝 따라오며 내가 방금 도면에 기재한 부분을 철거하는 긴박한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낮에는 시간과 작업량에 쫓겨 정신없이 일했지만, 저녁에 집에 와서 침대에 누우면 오늘 한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난 그냥 그림만 그린 것이다. 나는 빠르고 값싼 도면을 그리는효율적인 제도기로 고용된 것이었다. 이미 학생시절에 그림만 그리는 단순 노동자를 벗어나 사물을 관찰하는 눈을 키웠다고 자부해온 내가 공부를 다 마친 후에 도착한 종착역이 이 모양이라니. 우울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공연히 심통을 부리다 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길로 자전거를 달려 공사현장에 닿았다. 폐허가 된 건물에 들어가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미친 여자처럼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낮에 시간에 쫓겨 도면만 그리고 지나갔던 부분들을 찾아 조사를 시작했다. 그간 쌓였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풀리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의문점이 새로이 나타나고 또 풀렸다. 드디어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에 불이 붙으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집을 지은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고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원인을 규명했다. 다시 건축학자로 승격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밤이면 자주 공사현장에 나갔다. 밤에 혼자 조사한 것은 작업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 일은 경제적으로 형편없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나는 시간에 쫓긴다는 초조감과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차근차근 조사할 수 있었다. 그 길만이 나의 존엄성을 되찾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시 찾은 나는 일터에서의 행복을 되찾았다. 말단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학술계의 구조에 대해서 논하자면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시방 내가 남의 나라 학술계의 정의실현까지 염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만약 다른 장작의 화려한 연소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불쏘시개라면, 재도 없이 타버리는 삭정이기보다는 이왕이면 나는 속이 단단한 나뭇가지가 되어 한 톨의 숯조각이라도 남기기를 원했다. 내가 만약 상단에 올려진 굵은 장작이라 할지라도 속이 무르면 불길만 요란할 뿐 숯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남기고픈 숯은 학문적 실적뿐 아니라 정신적인 실속, 즉 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는 만족감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시 찾은 나는 일터에서의 행복을 되찾았다.

상상력이 넘치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오밤중에 혼자 일하자면 가끔씩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편이나 아이들 앞에서는 엄살도 심하고 어리광도 잘 부리지만 일터에서는 용감해지고 무거운 것도 잘 든다. 하지만 빈 집에서 여자 혼자 일하는 것이 밖에서는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붕에 뚫린 구멍을 통해 비둘기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불빛에 놀라 후다닥거리다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문틀이 틀어져서 걸어 잠글 수도없는 출입문은 바람이라도 불면 끼익끼익 하며 연신 인기척을 냈다.

어느 날 나는 층계를 저벅저벅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온몸의 솜털이 일어났다. 나는 인부들이 두고 간 곡괭이를 찾아 손에 단단히 쥐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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