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리히아벤트'‘라고 불리는 12월 24일 저녁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가정의 시간'‘이다. 그 귀중한 순간을 준비하기 위하여우리 가족도 하루종일 시장보고 청소하느라 진을 뺐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정은 집구석도 엉망인데다 쌈박질하느라고 전쟁터였다. 딸은 크리스마스에 전나무 트리가 빠지면 안된다고 떼를 썼고, 나는 집안이 귀신꼴인데 대체 어디다 트리를 세우느냐고 맞섰다. 다 큰 아이들이 그간 가사에 비협조적이었던것에 몹시 섭섭했던 점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밖에서 멀쩡히 자라는 생나무를 잘라서 집안에 들여놓고 얼룩덜룩 장식하는서구의 전통이 좀 변태스럽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엄마의 입장에서 이 나라 전통을 따르는 시늉이라도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이제 슬슬 긴장이 풀려서 올 12월은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과자 굽는 냄새 한번 안풍기고 건조하게 보낸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중요하면 지금이라도 선금 받고 떼어먹은 청소 30유로 어치나 해놓고 말하라고 따지는 나에게 딸은 눈물을흘리며 대들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논리로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부모가보복의 차원에서 빼앗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나는 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딸에게는 뭔가 절박한 일인것 같아서 우선 양보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하루종일 땀을 흘리며 청소한 후에, 복스럽게 가지를 친 아담한 전나무의 촛불 밑에서화기애애한 ‘‘하일리히아벤트'‘를 보낼 수 있었다.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멀리 사는 시어머니와 내 대녀에게 전화한 후에 우리는 다같이 티비를 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티비를 보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스운 일이겠으나 평소에 티비를 보지 않는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일이다. 좁은 거실의가구를 한쪽으로 밀어서 널찍하게 자리를 확보하고, 각자 이불과 담요를 가져와서 둘둘 말아 가장 안락한 자세를 취한 후에, 우리는맛있는 과자와 음료수를 챙겨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봤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업시간에 보았다는 영화다.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JoyeuxNoel, 2005년 까리옹 감독, 프랑스, 독일, 영국, 벨기에, 루마니아 공동 제작)는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의프랑스 전선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다.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실지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국군, 독일군, 프랑스군은 눈 오는 겨울 벌판에서 불과 몇십 미터 간격으로 참호를 파놓고 서로 대치하며 치열한 전투를벌이고 있다. 이 전쟁의 의미도 모르면서 명령에 의해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이들 최전선의 총알받이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오로지집에 갈 날만을 간절히 고대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12월 24일, 징집되기 전에 오페라의 테너 가수였던 한 독일 병사에게 위문공연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소프라노가수인 그의 애인이 그를 만나기 위해 크리스마스 위문공연을 주선한 것이다. 5년만에 재회한 옛 애인과 함께 듀엣을 부르자마자그는 참호의 전우들에게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안전하고 따뜻한 방에 앉아서 음악회를 열고 샴페인을 마시며 부하들을죽음으로 내모는권력층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말리지 못한 애인도 그를 따라 전방으로 간다.

그날 밤, 참호에 각각 쭈그리고 앉은 세 나라 병사들은 가족과 함께 보내던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며 눈물짓는다. 이때 영국국 군목이백파이프로 캐롤을 나지막하게 연주하기 시작한다. 눈 쌓인 겨울 벌판으로 들릴 듯 말 듯 이어지는 음률을 피아의 병사들은 참호속에서 숨을 죽이고 경청한다. 이때 갑자기 독일군 참호에서 테너 가수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노래를부르며 그는 전나무 트리를높이 들고 참호 밖으로걸어나간다. 돌발적인 행동에 아군도 적군도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른다. 벌판에 우뚝 서서 노래 부르는 적군을 쏘아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잠시망설이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결국 우뢰같은 박수로환영한다.

곧 소대장들 사이에 크리스마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각국의 병사들은 참호에서 나와 과자를 권하고 가족 사진을 보여주기시작한다. 부인의 사진이 든 지갑을 전투 중에 잃어버렸다는 프랑스 소대장에게 독일 소대장은 그가 수거한 전리품 속에서 사진을찾아 돌려준다. 자정이 되자 영국군 군목의 집도하에 성탄 미사가 올려지고, 독일군애인이 부르는수려한 아베마리아는 겨울 벌판의 밤하늘로 퍼져나가 공동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크리스마스 휴전협정은 지나갔지만 그날 이후로 그들은 서로 총을 겨눌 수 없게 되었다. 이튿날 그들은 힘을 합쳐 벌판에 널려있는전사자를수습하여 묻어 십자가를 세워주고, 영국군 군목의 축복으로 장례식을 치룬다. 그 후로 각국의 소대장들은 적군의 참호에 대한 집중포격의 정보를접하면적군들을 자신들의 참호로 불러들여 함께 목숨을 구한다. 각 참호를 자유로이 오가는 고양이의 목에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기원하는 쪽지를 달아주기도 하고, 프랑스 병정이 독일군 점령지역에 살고 있는 어머니 집에 가볼 수 있도록 독일 군복을 빌려주기도한다.

전쟁터의 우정은 결국 상부의 우편 검열을 통해 나라 별로 각각 발각된다. 이들은 징벌과 함께 다른 전선으로 배치된다. 이때이들은질책하는 상부를 향해 각기 항변한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성탄 미사를 올렸다.’’ ‘‘우리에겐 책상 앞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당신들보다 바로 앞에 있는 적군이 더욱 가깝게느껴진다.’’

이 마지막 말이 바로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점이다. 전쟁이 나면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보통사람들, 즉 병사들의 적은 과연 적국의 병사들일까? 혹시 국익이나 이념으로 포장된 양국의 기득권층은 아닐까?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인성에서 평화를 구현하는 직관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감동으로 나는 이튿날까지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참호에서 나와서 적군과 인사를 나눈 후에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로 가족 사진을 보여준 일이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만국공통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들은 평화를 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움이라던가사랑이라는 감정을 형상화해서 행동하는 힘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추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자정에올리는 성탄 예배의 전통, 매일 일정한 시간에 어머니와 커피를 마시던 습관, 이런 사소한 일상의 추억이 바로 평화를구현하는 힘은 아닐까?

아으, 내 새끼! 전나무 트리!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송진 냄새 풍기는 크리스마스는 내 아이들의 추억 속에 화목과 사랑으로기억될 것이다. 비상시에 힘을 주는 기억, 비상시에 무심코 평화를 선택하는 지혜의 힘. 크리스마스의 추억은 특히 냄새를 통해각인된다고 믿는 나는 허겁지겁 찬장을 뒤졌다.올해는 바빠서 포기했던 바닐레키펄에 들어가는 재료를 찾았다. 헤즐넛이 없어서 그 대신 땅콩에서 해바라기씨까지, 메주콩만 빼고비슷한 놈으로 다 갈아넣고 구웠다. 바닐라 향이 온 집안에 진동했다. 딸이 내 목을 안으며 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사랑한다고 속삭였다.사람이 완벽하지 못한 건 내 죄가 아니지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놓치지 않는 것은 내 소관이다.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하는 사회의 보수성을 나는 좀 무시하는 편이다. 전통과 관습은소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여성, 아동, 빈민이라는 약자에 대한 불공평을 합리화하는 시스템이라고 엿을 날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전통과관습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성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인간들이 비생산적인 일로 수고스럽게 부딪칠 일도 좀 더 적었을 것이고, 덕분에따스한추억거리를 저장하는 보물상자도 좀 더 얄팍하지는 않았을지? 따라서 우리의 인간성도 좀 더 강팍하지는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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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보는 나는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편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혁명은 거부한다.아니, 두려워한다. 무력 혁명은파시즘과 마찬가지로 구호에 휩쓸려 개인의 양심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결국 진보와 보수가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중도의 미덕으로 귀결된다. 개인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보수들은 나의 진보성을빛내주고 나의 진보성으로 인해 빛남으로써 나와 더불어 균형을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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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남의 것이건 내 것이건 전통과 관습에 대한 경외심이 별로 없는 나는 인간세상에서 추억의 보물상자에 기여하는 바가 적구나. 이거 미안해서어떡하나? 옷자락만 스치는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겨, 그 인연들과 더불어 풀잎을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봄바람같이 소소한기쁨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으로 약간 용서되지 않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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