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엔 어떤지 몰라도 내 눈에 천재인 남편은 기억력이 유난히 나쁘다.
“레몬트리 지난 호에 당신이 지멘스 회사 면접에서 떨어진 얘기를 썼는데, 당신의 아이 사랑에 독자들이 감동했대.”


“내가 지멘스에 지원한 적이 있어? 언제?”
이런 식이다. 나중에 자기가 치매에 걸릴까봐 걱정하면 난 속으로 “그까짓 치매! 그래 봤자 별 차이 없겠구만.“하며 몰래웃는다. 기억력이 이렇게 나쁘니 그동안 살면서 내가 못되게 군 것도 다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 걸?
“자기같은 남자랑 결혼해서 난 참 행복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당신은 그간 이혼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어.”
앗, 정말 그렇구나. 그런데 왜 내 기억엔 우리의 지난 날이 무지개빛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음, 나야말로 나중에 치매에 걸려도별로 차이가 없겠구만.

내 맘대로 신나게 살던 미혼 시절을 마감한 신혼의 임신 기간은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새 생명에 대한 경이심은남편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출산을 사랑의 절정이라 여겨 그 기적의 순간을 간절히 고대하고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갑자기 임신중독증을 일으키는 모체에서 급격히 격리된 아기는 곧장 신생아 전문병원으로 실려갔고, 나도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며칠 후에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후였다. 병실에 들어온 남편이 나를 보고 울었을때도 나는 아기가 아직 내 뱃속에 있는 줄 알았다. 나는 아기를 일 주일 후에 처음 보았다.

임신중독증의 원인은 고부갈등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사소한 갈등이었지만,****멀리 있는 내 부모님을 대신하여 시부모님께 의지하고 그들이 딸이 되어드리려던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 **** 무엇보다도 부인과 자식을 자기 부모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남편에 대한배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산후우울증까지 겹친 부인의 원망을 한 몸에 받게된 젊은 남자는 우왕좌왕했다. 세월이 좋았으면 절대로나타나지않았을 각자의 단점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절이 길게 이어졌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나는 사랑이 식었으니 이혼은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을 별로 신뢰하지 않아서 감정관리를 실리적으로 하는 남편은 포기하는 것보다 이 상황을땜질하며 견디는 편이 낫다고 여겨 악착같이 가정을 지켰다. 그 사이로 새로이 피어나는 자식 사랑은 남편의 노력에 힘을실어주었다. 아기를 키우는 기쁨과 부부의 갈등이 겹쳐 우리는 사우나처럼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살았다. 냉탕에 들어가 앉았을 때나는 어김없이 이혼을 얘기했다. 온탕에 들어가 앉았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온탕 생각만 나는것을 보니 그때 그 생활이 사실은 행복이었는지 아니면 사람의 기억력이 간사한 것인지.

내게 이혼이란 단어가 금기가 아니었듯이, 이혼율이 50%쯤 되는 독일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혼이란 개념에익숙했다. 친한 친구가 이번 주말에는 이혼한 아빠 집에 가기 때문에 함께 놀 수 없다는 말이 유치원 꼬마의 입에서 예사로나왔다. 부모의 이혼을 맞아 엄마와 함께 살 것이지, 아빠와 함께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도나름대로 머리를굴려본 모양이다. 내가 딸애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봤더니 당시 10살이던 딸이 금방 대답했다. 만약의 경우에 자기는 엄마하고살고 싶지만 오빠와 아빠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고, 자기는 오빠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부득불 아빠에게 갈 것 같다고.

독일에선 부부가 이혼할 때 보통 1년의 별거기간을 거쳐야 한다. 한 집에 살았더라도 1년 동안 “침대와 식탁”을 따로 썼다는,즉 따로 자고 밥을 따로 먹는 등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어야 이혼이 성립된다. 이 별거기간 동안에아이들이 누구와 함께 지냈느냐 하는 것이 아이들의 향후 거취에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이혼 후에 자녀를 맡고 싶은 사람은집을 구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던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파트너를 쫓아내야 한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나가라고 으르렁거리다가 이혼에 실패했다.

독일의 법은 이혼의 경우에 자녀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친다. 큰 변화를 되도록이면 막기 위하여 육아를 주로 맡았던 편에서아이들을 계속 데리고 살고,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온 편에선 양육비를 지불하도록 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혼 후에 엄마와 함께사는 경우가 약 80% 정도 된다. 아이들의 의견을 묻거나 심리학자들이 아이들을 관찰한 후에 아이들에게 이로운 쪽으로 판결해 주기도 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이혼 여부에 상관없이 양쪽의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독일의 법은 공동양육권을 이상적으로 쳐준다.그래서 이혼한 부부들은 아이들의 교육이나 성장에 대해 계속해서 자잘한 의논을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은 따로 사는 아빠나 엄마를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내가 아는 집 자녀들은 주중에는 엄마와, 주말에는 아빠와 사는데, 아빠의 새 애인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유원지나 레스토랑에 가보면 관계가 조금 어색해 보이는 주말 부녀, 부자들이 간혹 눈에 뜨인다. 선의는 있는데 서로에게 익숙하지않아서 약간 오버액션을 하거나 공연히 서로 미안해하는 모습이 아빠에게도, 어린 자녀들에게도 보이면 난 괜히 눈물이 난다.

독일에도 깊숙히 침투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은 특히 결손가정의 자녀들을 위협하고 있다. 독일에는 총 미성년자의 15%인 220만여명의 아동들이 한쪽 부모(대부분 엄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빈곤층에 속한다. 다른 쪽 부모(대부분아버지)에게서 양육비를 받는다 하더라도 실지로 주위의 많은 경우를 보면 순조롭게 이행되지 않는다.

양육비의 의무는 이혼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남성은 16세 청소년 시절에 몇 번 만났던 소녀가 출산한아기가 친자라는 것이 확인되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의 양육비를 매달 대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혼할 때 잘잘못을 따져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결혼생활이 실패했으면 공동으로 실패한 것이지 누구의 잘못으로깨졌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사생활에 국가가 간섭하는, 간통이라는 해괴망칙하고 전근대적인 법도 없다.

누가 잘못했던 간에 일단 이혼할 때는 결혼 후에 함께 모은 재산에 한하여 반씩 나눠 가지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파트너가 이혼후에 자립 능력이 없다면 능력 있는 쪽에서 그에 대한 생활비도 지불하게 되어 있다. 80년대에 이 법이 처음으로 실행되었을 때많은 남성들이 자기 여자 친구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결혼을 망설이는 모습을 나는 많이 보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쉽게 인정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여간해서 후회 안 하는 내가 절실하게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다. 아이들앞에서 내가 너무 쉽게 이혼 소리를 입밖에 낸 것이다. 나는 삶과 죽음이 한가지이듯이 결혼과 이혼도 한가지로 얽힌 꽈배기라고생각하므로 아이들도 그런 사실을 자연스럽게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양쪽 부모에게 철저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어린아이들이게는 부모의 이혼이 실존적 위협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당시에 간과했다.

그리고 보통의 선남선녀가 이루는 부부관계는 암만 덜그럭거려도 한 사람만 침착하면 그렇게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몰랐다. 깨버리지 않고 끝까지 안고 갈 항아리인 줄 진작에 알았다면 그렇게 마구 두들겨대지 않는 건데…. 그때 생긴 금을아직도 나는 수선하며 살고 있다.

정성껏 붙여 놓으니 균열의 흔적도 예쁘다. 그래서 나도 내 항아리가 고려자기인 줄 알았다.



이 글의 축약본과 사진이 레몬트리 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