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지만 식탐은 없는 편이다. 원래 소식을 하는 나는 암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잘 먹는 눈치면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고

양보하는 일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하루종일 굶으면서 일해도 끄덕없고, 단식의 경험도 있다.

그런 내가 참 희한한 경험을 했다. 지난 가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2박3일의 명상 수련회에서였다. 나는 명상 수련회가 뭔지도모르면서 정토회 법륜 스님을 뵙는다고 무턱대고 쫓아간 것인데, 안내에서 시계와 휴대폰을 압수하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찮은 예감이들기는 했다. 묵언과 소식이란 단어도 벽에 붙어 있었다. 나는 내가 모르던 세계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거기서의 모든 것이 내게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식사의 경험은 특별했다. 구수한 밥과 된장국 냄새를 맡으며 줄을 서서기다리는 순간에도 나는 소식이란 단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른 건 몰라도 소식에 관한 거라면 자신이 있었다. 덩치 큰남자의 반밖에 몸무게가 안 나가는 나로서는 같은 분량의 음식으로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 사실에 야릇한 안정감마저 느꼈다.

배식 받은 양은 정말 적었다. 흰밥 반 주걱, 두부와 버섯을 넣고 끓인 된장국 반 공기, 생김치 딱 세 조각, 그리고마지막으로 그릇을 씻어 먹으라고 주는, 내 새끼 손톱만한 무절임 한 조각, 어디서 구해왔는지 탁구공만한 사과 한 알이 전부였다.음식 봉사하는 사람들은 공연히 미안해서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음식을 덜어줬다.

숟가락 두 번만 놀리면 다 없어질 분량의 음식을 받아서 식탁에 앉는 동안 나의 시선은 재빨리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훑었다. 나보다더 많이 받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나보다 더 적게 받은 사람도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차르르 윤이 나는 찹쌀밥을 젓가락으로 조금씩 뜯어먹으며 나는 맨밥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처음알았다. 집에 돌아가면 밥만 한 솥 지어서 나 혼자 다 먹을 거라고 다짐하는 내 눈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우리집 전기밥솥꽃순이가 아른거렸다. 생김치에 붙은 고추가루 한알도 다 사랑스러웠다. 가로 세로 4cm를 넘지 않는 김치 조각 사이에는 뜻밖에도성냥개비만한 무채가 두 개나 나란히 붙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있다니. 나는 된장국을 숟갈로 아주 조금씩 떠먹었다.콩알만한 두부를 씹지도 않고 혀 위에서 살살 굴리기만 했는데도 솔솔 녹아서 벌써 없어졌다. 이렇게 조금 주시려면 차라리 이렇게 맛있게 끓이시지나 말지.

불교식의 공양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깝고 아쉬워서 싹싹 긁어먹은 그릇에 숭늉을 부어 무절임 조각으로 그릇을 깨끗하게 문지른 후 그 물을 후루룩마셨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숭늉에 고추가루가 동동 떴지만 이게 다 사람이 먹는 음식인데 싶어서 까탈이 일지않았다.

음식 봉사 하는 사람들이 밥통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조금씩 줬으니 아직 밥이 많이 남았을 텐데…일하는 사람들도 소식을 할까? 설마 저 남은 밥을 한 그릇씩 소복하게 퍼서 다 드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이렇게 조금만 주고?

식사 후에 산책을 나가면서 식당의 창문 앞을 지나갔다. 음식 봉사 하는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하는 게 보였다. 나와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보냈다. 고개를 빼고 그 사람들의 접시를 엿보려던 나는 황급히 자라 목을 도로 집어넣었다.

법당에 올라가 명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바깥을 내다봤다. 건물 뒤편에 있는 너른 과수원에는 잎이 다 떨어져 새까만 가지를드러낸 사과나무들이 마치 사열하는 군인들처럼 열지어 서 있었다. 늦가을 햇살 속에 가지가 뒤틀린 나무가지에는 탐스러운 사과들이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뮌헨에서 같이 간 어떤 언니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척하더니 빨간 사과를 하나 똑 따는 게 멀리서도보였다. 나는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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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식사 시간에도 똑같은 음식을 똑같은 양으로 받았다. 이번에는 김치 조각사이에 무채 왕건이가 없어서 섭섭했다. 옆사람이나보다 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된장국에 밥을 마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 내가 아파서 입맛이없었을 때 억지로 먹느라고 밥을 국에 말았더니 밥이 불어서 먹을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통에 쩔쩔맸던 기억이 났다. 옳다꾸나싶어서 나도 된장국에 밥을 말았으나 곧 후회했다. 맨밥이 어금니에 찰싹찰싹 달라붙을 때의 쫀득한 감촉과 고소한 밥냄새가 한없이그리워졌다. 게다가 밥이 불어 양이 많아지기도 전에 훌훌 더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다. 괜히 맞은편 사람을 원망했다. 그런데그 사람은 국에 만 밥을 아직도 아껴가며 잘 먹고 있었다. 얄미웠다.

식사 후에 나는 과수원으로 산책 나갔다. 정해진 식사 외에는 일체의 군것질을 하지 말라는 스님의 말씀도 있었고, 위에서 보인다는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과를 따먹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수원 구석에 있는 두엄더미 위에서 뒹구는 멀쩡한사과들을 보자 슬며시 마음이 동했다. 어차피 버리는 건데 저거 하나 주워 먹을까?

그 옆에는 사과를 담아놓은 나무상자가 하나 있었다. 땅에 떨어진 사과 중에서 좀 괜찮은 것들을 골라놓은 듯했다. 내다 팔 수는없고 버리기 아까우니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라도 먹으라고 골라놓은 거 아닐까? 내 멋대로 해석하며 주위를 돌아보니 산보하는 다른 사람들의 입도 오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하나 얼른 주워서 한 입 깨물었다. 아작! 단 물이 튀며새콤한 비타민의 위력이 온 몸에 돌았다. 이거 먹고 명상 잘 해야지. 과수원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과쨈 만들려고 골라놓은 것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나는 나중에 또 한번 가서 훔쳐 먹었다.

명상 시간에는 벼라별 망상이 다 떠올랐다. 이틀째부터는 음식에 대한 망상도 꽤나 들었다. 법당 부처님 앞에 소복히 쌓아올린 귤 접시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어휴, 저거 하나 까먹었으면. 부처님도 귤을 드시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명상 수련회 사흘을 먹는 생각만 하면서 보낸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명상을 배웠다. 다리가 아픈것도 잘 참고 잠도 잘 참았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망상을 관찰하며 내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맛이 좋았다. 명상을지도하는 법륜 스님은 간간히 설법을 해주셨다. 나는 스님의 말씀을 금쪽처럼 여기고 경청했지만 가끔 나도 몰래 딴 생각에 빠지기도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남의 물건 훔치는 사람 있어요?“하고 스님이 질문하셨다.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혼비백산하게놀랐다. 내가 사과 훔쳐 먹는 거 멀리서 보셨나? 스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남을 죽인 사람 있어요?“평범한 사람들은 그다지 크게 죄 짓지 않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도로 말씀한 반어법이었지만, 고지식하고 소심한 나,하마터면 번쩍 손 들고 고백할 뻔했다.

명상 수련회가 끝나고 감상문을 쓰는 시간이 왔다. 나는 종이를 더 달래서 글짓기하는 학생처럼 착실하게 줄줄이 적어나갔다. 그간내가 경험한, 유치하고 부끄러운 식탐의 느낌을 낱낱이 다 적으면서도 사과 훔쳐 먹은 얘기는 쏙 빼놨다. 스님이 그것까지아시면 너무 낙심하실 것 같아서 차마 적지 못했다.

나는 내가 평소에 쌓은 교양이 단숨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썼다. 사흘만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 말이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임을 경험한 나는 앞으로 지구상에서 굶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명상 수련회가 끝나고 집에 와서도 생각이 많았다. 내가 사흘을 중노동하면서 굶은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세 끼 밥을꼬박꼬박 얻어먹었는데도 그 양이 조금 적다는 이유로 그런 절박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세상만사에 대해이런저런 사고를 하며 진지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도 배고픈 본능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허상인지 알게되었다. 본능 앞에서벌거숭이로 드러나는 나의 진면목이 내게는 도리어 신선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사흘 굶은 사람의 심정이 내 심정처럼 이해되었다.정말로 자식을 사흘이나 굶긴 사람들이 남의 담장 뿐 아니라 뭐를 넘고 들어와도 도덕성을 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흘 정도는 자발적으로 굶어도 본 내가 이번에 소식을 하면서 그렇게 절박한 감정을 느낀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원해서 하는 일과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는 일의 차이였다. 같은 일이라도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가진 자'‘가겸손하기는 쉬워도 ‘‘가지지 못한 자'‘가 너그럽기는 어렵다는 이치로 이해되었다.

가뜩이나 세상이 시끄러운데 소말리아 해적이 또 배를 납치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그들에게 납치되어 죽을 고생을 했던한국 선원들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나는 버럭 짜증이 났다. 세계가 무법천지야? 강대국들은 뭐하는 거야? 사회정의를 위해서라도그런 깡패들은 호되게 혼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이 내게 말했다. 그 해적들은 예전에 자기 나라 바다에서 고기 잡던어부들이었어. 강대국의 대형어선들에게 생활 터전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들도사흘 굶은 도둑에서 시작한 거구나. 내 밥상의 풍성한 식단이, 우리의 식탐이 무서운 해적을 키운 거구나.

굳이 불교의 이치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법륜 스님의 말씀대로, 눈이 발견하고, 발이 걸어가서, 손이집어온 음식을, 입이 저 혼자 먹는 것이 얄밉다고 못 먹게 하면 입도, 눈도, 발도 손도 다 같이 죽는다. 암만 튼튼한 다리도심장이 약하면 달리지 못하고, 암만 튼튼한 심장도 겨드랑이에 난 종기 때문에 죽는다.

이웃에 배고픈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부자들은 곳간에 쌓아놓은 양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담장을 높이고 총 든 보초를 세워봐야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나는 서민이라고 엄살을 떨지만 사실 나는 부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꽃순이표 전기밥솥 가득히쌀밥을 지어서 혼자서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절대적으로 소수다. 내 곳간의 양식을 두고두고 즐기고 싶은나로서는 배고픈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