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작년 봄에 썼다가 발표하지는 않고, 그 대신 문장을 발췌해서다른 글에 써먹었네요.

바로 아랫글 ‘‘광우병 시대의 라자니에'‘에도 겹치는 문장이 꽤 있군요. (그래서 연달아 나란히 올립니다.)또 어디 다른 글에도 사용했는지,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중복 게재가 민망스럽긴 하지만, 제 글을 보관하는 개인 블로그라고자위하며 독자님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홈에세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 친구 강신주와 나의 공통점은 가정의 화목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여자들치고 살림을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도 각자 개성은있어서 신주는 밥하기를 싫어하고 나는 청소하기를 싫어한다. 신주는 김치는 사먹으면서도 진공청소기는 ‘‘투명이'‘라고 사랑스럽게부르며 애용한다. 나는 20년 묵은 육중한 지멘스 진공청소기를 마구 끌고다니다가 호스가 찢어지면 누런 포장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쓰며 구박할 뿐이다.

그러나 같은 살림이라도 부엌용품은 대우가 다르다. 20년 전에 결혼 선물로 받은 내쇼날 전기 밥솥의 플라스틱 다리 하나가 불에 타서 녹았을 때나는 남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나무로 의족까지 달아주었다. 길이가 맞지 않아서 기우뚱하게 섰지만 나는 “우리 삐딱이는 자세는삐닥해도 밥은 얼마나 잘 하는데.“하며 대견해했다. 그러다가 싼 게 비지떡이라고 금방 망가진 중국제 ‘‘순둥이'‘를 거쳐 국산'‘꽃순이'‘에 이르기까지 나의 전기밥솥은 늘 애칭으로 각별하게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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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꽃순이와 이름 없는 못난이\


이상하지 않은가? 명색이 건축인이라는 여자가 제 가정의 주거환경에는 무심하면서도 먹는 것에는 각별하다니. 처음에 이사왔을 때는월세로 사는 집일망정 건축인의 명예를 걸고 한 뼘의 공간도 어긋남 없이 꾸며놓고는 나중에 살면서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누가 봐도이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이유는 나의 불규칙적인 직업에 있다. 프리렌서로 문화재 건물을 조사하는 일을 하는 나는 일감이 없어 집에서 놀때도 있고, 길게 집을 비울 때도 있다. 주부가 며칠씩 집을 떠났다 돌아와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의 산만함이라니… 가족들이 나없어도 잘 살았다는 증거는 여기저기 어질러진 살림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이를 다시 정돈하려면 주부인 내가 거의 노예수준의희생심과 노동력을 바쳐야 할 텐데, 난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옛날엔 나도 그랬지만 아이들이 다 커버린 지금은 그러기 싫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가족구성원 모두가 동등하게 가사노동을 나누는 현명한 집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능력밖의 일이다. 세월 속에 숙명처럼 굳어버린 가족공동체의 습성을 재조정하는 것은 내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진다. 마치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유전자를 조작한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내가 이치를 파악하고 내 능력을 안다고 해서 해탈한 것은 아니다. 그냥 가끔은 괴로워하고 가끔은 외면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갈뿐이다. 세상이 부추기는 경쟁심리의 포로가 될 때 나는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사무쳐 극단적인 돌파구를 넘보기도 한다. (내가어디 가서 산들 이보다 못하랴? 확 나가 버려?) 확 기운이넘칠 때는 어떻게 좀 개선해보려고 부부가 의기투합해서 자식들에게 데모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몇 년 후 아이들이 성장해서 집을나가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기에 같이 사는 동안 큰 마찰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독일에서 문화재를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영구적인 보존을 이룩하려고 극단적인 공사를 하는 대신에 향후 몇 년간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최소한의 수술만을 감행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바치며 시간을 벌다보면언젠가는 신기술이 발명되거나 새로운 상황이 닥쳐 절로 해결되기도 한다.

그런 청소에 비하면 밥하는 일은 얼마나 창조적인 일인지? 청소가 문화재 보존이라면 요리는 분명 새로 집 짓는 건축활동이다.완성된 접시의 그림을 미리 머리속에 그려놓고, 설계와 자재 구입과 노동의 수순을 밟아, 여러 분야의 공정이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맞물려 돌아감으로써 정해진 시점에 정확하게 완성돼야 한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기능성(영양)과 예술성(맛)에다가 경제성까지고려해야 하는 고난도 통합예술이다. 게다가 식사 시간에 맞춰 신선하고도 따끈하게 상을 차릴라치면, 설계 마감 직전에 밤샘하는스릴까지 겹치니 건축을 전공한 내게 요리란 익숙하고도 정겨운 노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요리 솜씨가 좋은 사람이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정식으로 요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른다. 그냥 내논리대로 이리저리 꿰맞추며 실험해봄으로써 칼자루 쥔 사람의 권력을 소신껏 남용하는 것이다. 독일사람들은 내가 한국음식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한국사람들은 내가 독일음식을 잘 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장님의 세계를 드나들며 찬사를 받는 외눈인 셈이다. 우리가족들은 외식이라면 시큰둥해한다. 내가 해주는 음식이 훨씬 더 맛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돈을 쓰느냐는 것이다. 또한 나는 우리아들의 졸업 문집에 이름 석자가 올라간 유일한 엄마다. 내가 가끔 해준 한국음식이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아들의 친구들이 감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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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이 살림을 했다면 분명히 나보다 요리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는 절대로 아무 것도 안 해먹지만남편은 어쩌다가 혼자 있게 되면 신이 나서 벼라별 음식을 다 해 먹는다. 저 혼자 먹으려고 전식부터 후식까지 갖은 정성을다한다. 이 사람은 부엌살림을 사는 것도 즐겨서 나는 자칫 잘못하다간 좁은 집에 살림이 늘까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쫓아다닌다.

우리는 독일 칼스루에 대학에 다닐 때 주거공동체에서 만났다. 세 명의 남녀학생들이 작은 아파트를 하나를 빌려서 부엌과 욕실을공동으로 사용한 그 주거공동체에선 부엌이 유일한 공동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다른공통점이 없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요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에, 옆방 남학생은부엌에서 요리 이야기를 하다말고 내게 프로포즈를 했고, 내가 거절하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텅 빈 가스 오븐에 불을 붙이고오븐을 활짝 열어젖혔다. 100년 묵은 옛날 집이라 부엌에는 난로가 없어서 추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서로 너무 다른 것이 신기해서 기웃거리다가 자석처럼 딱 붙어버린 것을 보니 진짜로 상극인가보다.상극끼리 만나서 치고 받고 물고 밀다 보니 그 관계 안에서만 성립되는 묘수를 터득해서 이제는 같이 늙을 생각도 하게 되었다.인간관계도 건축설계와 똑같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안을 하나 채택해서끈질기게 갈고 닦아 최고의 답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부엌의 식탁에서 만난다. 이제 우리 곁에는 우리를 빼닮은 십대 후반의 자식들이 앉아 있다. 별 것 아닌 음식을차려놓고도 식탁 분위기 하나는 화기애애하다. 우리집에서 화기애애하다는 말은 불꽃 튀는 토론의 장이라는 말이다. 엄마의 나라인한국식 장유유서도 없고 아빠의 나라인 독일식 예의범절도 없다. 논리와 말빨의 치열한 대결만 있을 뿐이다. 대부분은 고등학생인딸아이와 남편 사이에서 불꽃이 튄다. 올 가을에 대학생이 되는 아들은 소리 없이 웃으며 경청하는 편이고, 나는 남들 싸우라고추임새만 넣는 편이다. 싸우다가 화가 나면 어느 하나가 부르르 일어나 접시를 들고 제 방으로 가버리는 일도 생긴다. 재미있는것은 암만 화가 나도 숟가락을 놓고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와중에도 먹던 접시를 꼭 챙겨나가서 다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집 식탁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이야기가 내가 봐도 황당하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던 차에 이를 에세이로 엮어보라는 레몬트리의 제안을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독자들과의 공명을 미리 즐거워하며 행복감에 젖는다.

(2008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