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쓴 글입니다. 독일어로 쓴 제 책이 나온 직후인 2005년에 쓴 글인데 지금 읽어도 새로운 느낌입니다.


출세 - 우연과 운 (2005년)


근래에 나는 세칭 출세라는 걸 했다. 내가 지난 여름에 독일에서 낸 전공책에 대한 평이 좋아서 방송으로도 몇 번 나가고일간지에도 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어제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가 연락을 했는데 그 고장에서 발행되는 신문 두 개에도 내책에 대한 평론이 실렸다고 한다.

그 평론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긍정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누가 썼는지 이름만 보아도 평론의 내용이 짐작이 가기때문이다. 학계의 바닥은 좁고도 유치해서 피아가 선명하다. 아무 짓도 안하고 가만히 연구만 해도 누구나 다 벌써 어느 편에 속해있게 된다. 그리고 반대편은 항상 존재한다. 조금 있으면 내 책에 대한 부정적이 평론도 오를 것이다. 그들은 내 책을 읽기도 전에 평론에 쓸 말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으론 나는 아마 - 늘그래왔듯이 - 나쁜 평론에도 초연할 것 같은데, 글쎄 두고 봐야겠다. 나도 처음 당하는 일이니까.

이 책으로 인해서 나는 내가 단 하나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나는 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 않더라도 단 한 군데서만은읽히게 되기를 바랬다. 칼스루에의 문화재청에서 내 책을 참고로 하기를 바랬다. 그것이 이루어졌다. 내 책은 벌써부터 그 도시의문화재를 선정하는 일에 기준이 되고, 증빙자료로 쓰인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나는 과연 성공을 한 것일까? 이 책으로 인하여 내게 돌아오는 실질적인 이익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읽을 만한독자가 한정되어 있으니 좋다고 많이 팔릴 책도 아니고, 요즘처럼 국고가 텅텅 비어 문화재청에서 감원하고 있는 와중에 내게고정적인 직장을 만들어 줄 리도 없다.

단지 나는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으니 여기저기서 원고나 강연청탁이 올 것이다. 일만 많고 머리만 아프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다.그런 계통으로 계속해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는 일은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게 실속없는 책을 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봉사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식으로 더 이상의 봉사를 한다면 명예 하나만 보고 하는 일일 텐데내게 있어서 명예는 하나도 아쉽지 않다. 남이 추켜준다고 내 실력이 올라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십오 년간 한우물을 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묵묵히 한 길을 갔다. 세상에서말하는 성공의 비결이랑은 아주 다른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나의 연구는 갑자기 주목을 받고 그와 동시에맞바람을 받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엮어져 나오기도 전에 구설수에 휘말렸다. 나 개인적으로는 적이 없지만 나의 지도교수는 권력이막강했던 만큼 적도 많았다. 학계의 전쟁에선 대장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해서 항상 졸개를 친다. 최소의 도덕성이나 인간으로서의자존심도 없는 곳이 전쟁터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졸개로서 적군의 세찬 바람을 맞았지만 나는 내 연구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연구가 애초에 주목조차 받지않을 때에도 나는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내 논문이 우여곡절 끝에 책으로 출판된 것이나 그 책이 호평을 받은 것이나사실 다 우연과 운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앞으로도 우연과 운에 의해서 여러가지 변수가 일어날 것이다. 좋은 일도 일어날것이고 나쁜 일도 일어날 것이다. 나의 실력은 변함없이 고대로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변수에 따라 나를 평가할 것이다.

현장에서 건물조사하는 일은 학자들 사이에선 격이 낮은 일에 속한다. 그 작업은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직위가 높아지면 아랫사람에게시키는 일이다. 나는 현장조사를 잘한다. 고된 일이지만 나는 대단히 중요한, 그리고 아무나 못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서 문화재청의 어떤 실력자가 나의 이런 태도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직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조사를 직접실행하는 그가 바로 독일 학계의 현장조사의 대부라는 걸 나는 나중에 우연히 알았다. 그는 지금 국제적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는데나를 멤버에 넣겠다고 약속하였다. 그가 성공하면 나도 덩달아서 뜨게 되는 것이다. 그가 실패하면 나도 덩달아서 실속없는 무명의학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실력이나 노력과는 너무나도 상관이 없이. 그의 성공여부에 따라서 사람들은 나의 실력을 평가할것이다.

나의 자질은 고대로 있는데 우연과 운에 의해서 출세의 여부가 갈리는 것을 나는 오십 인생에서 너무나도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나는 앞으로도 세칭 출세를 한다고 해서 자만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가 세칭 출세를 하지못한다고 해도 나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을 계획함에 있어서 나는 세칭 출세했다고 쳐주는 직업이라 하여 특별히 선호하지도 않을 것이며 세칭 보잘 것 없다고 하는 직업이라도 내 적성에 맞는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