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4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칼스루에 한인회지 1995년 겨울호에 실렸던 글인데 오늘날 읽어도 유효한 느낌입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겠지요. 이 글을 읽으신 후에 제가 링크해드리는 신문기사를 읽어주셔요.


자전거를 잘 만드는 남자 (1995년)

지난 여름에 나는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뒤에 매달아서 아이들을 싣고 다니는 트레일러와 함께 집앞에 세워두었는데 밤 사이에 모두 없어진 것이다.

그날따라 밖에서 아이들이 나를 몹시 들볶아서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자전거와 아이들을 끌고 간신히 집에 도착했는데, 마침 남편이 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긴장이 풀려 대충 아이들과 짐만 챙겨서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뻗어버렸다. 날도 저물었고 하니 의례히 남편이 자전거를 지하실에 내려놓을 것으로 믿었고, 남편은 남편대로 집에서 머리 쓰는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라 내가 자전거를 잠궜겠으려니 믿으며 그냥 얼른 다시 책상 앞에 앉았던 모양이다.

남편은 평소에 자기 전에 잠옷바람으로라도 자전거를 내려다놓곤 하는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날따라 깜빡 잊고 그냥 자버렸단다. 잠그지도 않은 자전거가 눈에 띄는 트레일러까지 달고서 날 좀 보소 길가에 밤새도록 서 있었으니 도둑질을 하도록 유혹한 우리의 죄가 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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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도둑 맞은 것을 알고 나는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하루종일 침대 누워서, 내 새끼들이 오물오물 타고 다니던 트레일러도 아까워했고, 남편이 내 체격에 맞춰서 만들어줘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내 자전거도 아까워했다. 물건을 곱게 쓰는 습관이 있는우리들이 알뜰살뜰 다루며 몇 년을 함께 산 그 놈들이 지금 어디에 어떤 상태로 갖혀 있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전거도 못 잠글 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자기연민에 빠져서, 도대체 무슨 큰 일을 한답시고 이제는 집안일도 전혀 못 도와주나 하며 애꿎은 남편을 탓하고 원망했다.

환경보호에 대한 신념으로 자가용 없이 사는 우리에게 자전거는 하나의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나의 남편은자동차를 인류가 발명한 최악의 문명의 이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동차는 공해와 교통사고를 수반하며 거리와 도시를 꽉 채움으로써 현대 인간의 진정한 삶의 질을 뚝 떨어뜨리는 괴물쯤에 속한다.

그는 자동차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너무 많음을 거부한다. 자동차는 생태계가 용납하는 한정된 숫자 안에서만 제구실을 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동차는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기 위해 발명되었지만 인간이 정도를 넘어서서 너도 나도 다가지겠다는 바람에, 도로만 꽉 채우고 정작 자동차가 꼭 필요할 때에는 길이 막혀 제 구실도 못하는 채, 인간살상무기 제1호로 둔갑해버렸다는 것이다.(1)

각주(1): 독일에서는 매년 약 600명이 살인에 의해, 그리고 약 10000명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생명을 잃는다.다리나 건물붕괴 사고가 일어나서 10000여명이 사망했다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런 대형사고가 해마다 거르지 않고일어나는 나라가 지구상에 있다면, 인명을 경시하는 미개한 나라라고 전세계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피해를 감지하는커녕 나에게 자동차가 정말 필요한가를 따지는 대신에 어느 가정에서나 자동차는꼭 있어야 한다는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동차의 구입과 유지에 생활비의 큰 부분을 쓰면서 그만큼 더 벌어들이기 위해 허덕이는 등 정신적인 피해도막강하다고 주장한다. 기차나 택시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자가용보다 훨씬 비싸게 먹힌다는 것은 옳지 않은 계산에 의한것이다.(2)

각주(2): 자동차 없이 사는 우리집의 경우를 보면 온식구가 일년에 두세 번 정도 500Km 떨어진 북독의 시댁에기차로 다녀오고, 평균잡아 일 년에 서너 번은 남편과 내가 따로 다른 도시에 다녀온다. 도시 안에서는 자전거, 전차, 택시를이용하는데 우리집 일 년의 교통비는 도합 1500 마르크 정도이다. 만약 자가용이 있다고 가정하자. 주위의 차 있는 사람들에게물어보았더니 자동차의 구매와 유지에 한 달에 적어도 700마르크는 잡아야한다고 했다. 그러면 일 년에 8400마르크로 우리가정보다 7000마르크나 더 쓰는 셈이니, 우리로서는 그 돈으로 매년 온식구가 한국에 다니러가는 호강을 한다해도 하나도 아깝지않다는 소리다. (독일 구화폐인 2마르크는 1유로에 준함)

모든 사람들이 자가용을 없애고 그 대신에 출퇴근할 때, 놀러갈 때, 심지어는 담배 사러갈 때에도 택시를 이용한다고 가정하면,모든 택시를 메르체데스 벤츠로 바꾸고도 전체적으로 더 싸게 먹힌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자가용과 택시들은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숫자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비하여, 모두 택시를 탄다고 가정하면 효율적인 운영이가능하므로 거리에 나다니는 자동차의 숫자를 대폭 줄이면서 택시 요금도 내려서, 사람이 더욱 값싸고도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거리는 텅텅 비게 되어 길이 막혀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말은 옛말이 되고 주차장을 찾느라고 빙빙 도는 일도 없어지고 공기도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이 집앞의 골목에서 놀 수도 있지 않겠는가?(3)

각주(3): 독일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 어린이는 매년 약 600명이다. 이는 1-5세 어린이 사망의45%고, 6-10세 어린이 사망의 70%나 된다. 자식을 가슴에 묻는 부모의 절반 이상이, 병들세라 찬바람 막아가며 애지중지기르다가 질병이 아닌 교통사고로 어처구니없이 건강하던 자식을 잃는 것이다. 과연 남에게만 잃어나는 일일까?

삶의 터전을 보다 윤택하게 할 대안이 이렇게 확실하게 존재하고, 누구나 납득하고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도실현이 불가능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가용 중독증에 걸린 때문이라고 남편은 단정한다. 각자 자가용을 가지는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방법을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상태가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게다가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태평양 열도의 평화로운 섬들이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물에 잠기는 속도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있을 만큼 현재의 지구환경 상태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이 책임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의극소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독일정부에서는 몇 년도까지 몇 퍼센트의 공해가스를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고 있다. 공업지대, 주택 등 다른 부문에서는 모두 목적을 달성하고 있으나 유일하게 교통부문에서만은 끈질기게 줄지 않고 있다.

자동차를 각 가정마다 보유한 나라와 사람수는 세계인구분포도로 보아 극소수에 속한다. 만약 인구가 많은 인도나 중국에까지 이런 현상이 퍼진다면, 폭발적인 환경파괴로 인하여 우리는 지구를 포기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자동차에 집착하면서 무슨 염치로 그들을 말릴 것인가? 가진 자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없는 자가 가지게 되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하는 자동차 문화야말로 불공평의 극치다.

그래서 우리 남편에게는 남편에게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취미를 가졌거나 멀쩡하던 차를 좀 더 나은 기종으로 바꾸는 사람을 보면 비도덕적이라고 공격해대는 못된 습관이 있어서, 그의 견해를 인정은 하지만 그처럼 과격한 성격이 아닌 나는 자주 민망스럽다.

자동차에 관한 남편의 견해에 이제는 전적으로 동감하고 기꺼이 동참하고 있는 나로 말하자면, 고백하건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나 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거침없는 소신에 대한 선망과, 내가 자가용을 거부하는 것이 나의자유이니만큼 자가용을 선택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인정해야 한다는 나의 또 다른 원칙 사이에서, 똥 싼 바지 입은 것마냥자세를 못 정하고 엉거춤춤 서 있는 편이다. 나와 실랑이를 할 때마다 남편은, 너는 건축을 공부하면서 도시계획에서 자가용의 피해와 영향을 체계적으로 배운 처지에, 소위 안다는 사람이 그런 무책임하고 비겁한 논리를 펴느냐고 나의 신성한 직업의식까지 들먹이며 닦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빼놓은 모든 사람들이 자가용을 가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라는 논리가 내 정서에 맞지 않아서 남편을 달래곤한다. 내가 당장은 너처럼 입에 거품을 물지 않아서 무력해 보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기회가 오면 온건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자가용에 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다수를 설득시킬 날이 올 텐데 두고 보아라, 네가 평생 악다구니 쓰면서 주장하던 것의 몇 배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살살 꼬신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자동차의 횡포의 대안이 되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다. 자가용 없이도 얼마든지 편리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를 넘어서, 자가용이 없어야만 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활로써 증명해 보이는 데 꼭필요한 삶의 동반자이다.

학생 때는 칼스루에 자전거클럽에 가입하여 이 도시의 곳곳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늘리고 안전성을 개선하는 정책을 관철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고, 회원들과 함께 무료 자전거 수리소를 경영하며 시민들의 자전거 사용에 대한 편의를 도모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사는 오늘까지 조금도 닳지 않았다. 남편은 요즘 매일같이 Würmersheim이라는 곳으로 일하러 다닌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이라서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차를 뽑아주었는데, 직책으로보나 나이로 보나 제일 윗사람인 우리 남편만 자전거로, 또는 전차와 인라이너 스케이트를 번갈아 타면서 다닌다.

한번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를 위하여 오전에는 대학에 근무하고, 오후에는 그곳에 출근하여 매일 밤 열두시 반에 들어오는 그가 길에 허비하는 시간은 왕복 두 시간이다. 자동차로 간다면 반밖에 안 걸리는 거리다. 자정이 넘어 내가 차려주는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금방 곯아떨어지는 그를 볼 때마다, 자동차를 타고 하루에 한 시간씩이라도 모자라는 잠에 충당했으면 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그의 기개가 펄펄한 것을 존경한다.

결혼하기 전에 그는 나에게 날렵하고 가벼운 자전거를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 자전거로 우리는 알프스를 넘어서 이태리까지 자전거여행을 하였다. 결혼하여 아이가 생기자 이번에는 아이를 싣고도 안정성 있도록 튼실한 자전거를 똑같은 스타일로 두 대만들어서 나란히 타고 다녔었는데, 그 쌍둥이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뎅그마니 혼자 서 있는 남편의 자전거를 볼 때마다 내 것은 지금 어디에 넘어져 있을꼬 눈에 삼삼하여 목이 메었다. 잃어버린 것은 자전거 뿐 아니라 그에 담긴 모든 추억도 함께였다. 위로한답시고 남편이 “네 자전거를 이번엔 어떻게 만들어줄까?“하고 묻는 말도 마치 자식을 잃고나서 남편이 새 아기를 만들자고 덤벼드는 것 같아서 나 다시는 자전거 안 탈 거라고 심통을 부렸다.

이렇게 이틀을 끙끙 앓고나니, 잃어버린 것이 물건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남편이나 새끼들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났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만들어주겠다는 남편이 살아 있는 한 자전거 열 대쯤 없어진들 무슨 큰일이며, 트레일러에 앉아있던 내 새끼들이 내 곁에 있는 한 그까짓 구루마 있으나 없으나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끙끙 앓으며 신경질만 냅다 부리더니 갑자기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소중한 식구들이라고 디립다 서비스를 해대는 주부를 선량한 식구들은 다행히도 미친 여자 취급하지 않고 기뻐만 하였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다음번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 전에 이 기사 좀 읽어보셔요. 링크: MB 자전거 정책 ‘녹색’ 내세우며 ‘토목 페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