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어느 여름 저녁에 밥을 짓고 있는데 밖에서 웬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나가보았더니 초등학교 2학년생인 우리 딸과 옆집에 사는 소피가합창으로 앙앙 울면서 큰 가방을 질질 끌며 걸어오고 있었다.

1주일간의 스카우트 캠프를 마치고 관광버스에서 내렸는데 자기네들 부모만마중나오지 않은 것이 너무 서럽고 처량해서 오는 길 내내 대성통곡을 해댄 것이다. 버스가 도착하는 곳이 그리 멀지도 않고,자기네들 손으로 들고 나간 짐인데 들고 들어오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아서 데리러 갈 시간에 맛있는 것이나 해준다고 그냥 집에있었더니 그 난리가 난 것이다. 그때 나는 아이들의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의 심리를 헤아려주는 배려가 부족했다는걸 깨닫고 반성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오래 살았던 중소도시를 떠나 뮌헨으로 이사왔다. 평생 자동차 없이 살아온 우리는 대중교통에 퍽 익숙한편인데도 거미줄처럼 얽힌 대도시의 지하철, 전차, 버스 노선에는 주눅이 들었다. 가뜩이나 방향감각이 없는 나는 툭하면 길을 잃고헤맸다.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아들은 복잡한 전철과 버스를 척척 갈아타며 나보다도 빠릿빠릿하게 잘 돌아다녔다. 학급에서단체로 시내에 있는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도 저녁에 보호자가 픽업하게 되어 있었지만 아들은 혼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엄마, 나 혼자 집에 올 줄 아니까 데리러 나오지 마.“
“어머, 어떻게 그래? 다른 엄마들은 다 데리러 오는데 너 혼자만 아무도 안 오면 창피하잖아?“
“그게 뭐 창피해? 날도 어두운데 엄마가 길 잃을까봐 더 걱정돼.“
다른 학생들은 엄마가 마중 나오는데 저만 혼자 집에 가는 일이 쓸쓸하지 않을까 해서 그런 것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길눈이밝은 아이를 내가 데리러 나간다는 일이 넌센스이긴 했다.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데도 내가 더 우기다간 남의 이목에만 신경쓰며 사는 사람의 본을 보이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아들의 말을 따랐다.

몇 달 후에 학부모 모임에 갔더니 다른 엄마들이 그날 우리 아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는 얘기를 했다. 다른 엄마들이 차로데려다준다는 것도 사양하고 작고 마른 꼬마가 북반구의 깜깜한 겨울 저녁에 퇴근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입구 속으로 사라져갔다는것이다. 다른 엄마들이 겉으로는 아들을 칭찬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나의 방임을 흉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는 뒷통수가간지러웠다.

아직 아기였을 때 아들은 놀이터에서 쓰레기를 줍는 아저씨의 하이텍(?)집게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제 아빠가 고물 자전거에서뜯어낸 부품으로 집게를 하나 만들어줬지만 별로 만족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며칠 안되어 아들은 웬 주소가 적힌쪽지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학교의 소사 아저씨가 그런 쓰레기 집게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고 어디서 그런 걸 살 수 있느냐고물었단다. 모른다고 하길래 학교 옆 관사에 사는 그 아저씨의 부인에게 가서 다시 묻고, 학교 사무처로, 결국은 교장선생님에게까지 가서 전문용품 가게의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아직 글씨를 모르는 아이를 위해서 교장 선생님이 주소를 직접써주셨다.

아들의 집념에 탄복한 나는 아들을 데리고 전차를 갈아타고 이리 꼬불 저리 꼬불한 길을 찾느라고 헤매면서 그 가게에 갔다. 그러나웬 일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이튿날 아들은 혼자서 다시 가보겠다고 했다. 전차의 번호나 표지판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의6살짜리 꼬마였지만 집게를 향한 아들의 열망이 컸기에 나는 아들이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한 번은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 끝에드디어 아이는 빛나는 집게를 들고 집에 왔다. 소사 아저씨 집게보다 조금 더 비싼 집게가 기술적으로 더 정교하길래 그것을사왔다면서 아들은 우리에게 거스름 돈을 내밀며 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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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사온 집게, 아직도 아들의 소중한 보물이다.


자립을 향한 이런 성공의 일화에는 우리 아이들이 자가용 없이 자랐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간난아기 때부터 대중교통에 익숙한우리 아이들에겐 전차나 기차를 갈아타는 일이 다른 집 아이들이 자기 집 자가용의 안전밸트를 매는 일만큼이나 쉽고도 당연한일이었다. 그러니 전차나 기차를 한번도 타보지 못한 채로 청소년기를 맞는 친구들에 비해서 자립이 수월했다. 처음으로 친구들끼리어울려 놀러다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 아이들은 교통편 뿐 아니라 일체의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게되었다. 사소한 일상사에 자신이 있다는 건 교육적으로 좋은 일이다.

자가용이 없이 산다는 사실이 아이들 교육엔 유익하다 치고, 우리 어른들에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몇년 전에 집을 보러다녔을 때약속 장소에서 복덕방 직원과 서로 기다린 적이 있다. 복덕방 직원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우리가 설마 고객이라고 생각하지못했으므로 계속 다른 방향만 바라보며 기다렸던 것이다. 자기네 같은 업체를 통해 집을 산다는 자체가 신분상승이라는 최면을 걸어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복덕방 직원은 그날 휘황찬란한 오픈카를 대동했다. 다음 집을 보러 이동할 적에 우리는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밟아 복덕방 직원의 2인용 스포츠카보다 더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그 사람의 눈을 왕방울만하게 만들었다. (시내에서는 자전거의이동속도가 자동차보다 빠르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자전거 위에서 남편과 나는 그런 날날이차 백 대 끌고 나와 봐야 우리자전거를 이기겠느냐며 허리를 꼬부리고 웃었다.

이렇게 독일에선 자동차가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그가 끌고 나타나는 자동차로서 그 사람의 계급과 재력 뿐 아니라 교양과성품까지 알아맞출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독일은 가족당 자가용 보유율이 1.1대인 자동차 강국이다. 세계에서유일하게 속도 제한이 없는 무료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운영하는 나라답게 자동차 산업의 비중도 크고 로비도 막강하다. 그런사회에서 자가용 없이 산다는 것은 남이 모르는 특별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뜻한다. 남과 비교될 일도 없고, 자동차를 사거나유지하느라고 돈 쓰고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정신적, 물질적으로 상당히 자유롭다. 또한 지구 환경을 위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실천에 옮기니 양심도 가볍고, 당당한 주인 의식도 든다.

자전거 마니아인 남편은 예전에는 차가 꼭 필요한 경우에도 뭐든지 다 자전거로 해결하려고 들어서 내가 진땀을 좀 뺐다.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자동차 조합이라는 게 생겨서 우리는 차가 필요한 경우에 빌려 쓰고 있다. 뮌헨에 사는 6500명의 회원이자동차 230대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합인데, 용도에 따라 사용료가 저렴한 소형차를 빌리기도 하고, 가구를 옮기거나 인원이 많을때는 짐차, 마이크로 버스를 빌릴 수 있으니 여간 경제적이고 편리한 게 아니다. 가입할 때 내는 500유로의 보증금은 탈퇴할 때되돌려받는다. 매달 내는 7유로의 회비와 꼭 필요한 경우에만 빌려 쓰고 내는 자동차 사용료는 한 가정 전용으로 자동차를 상비하는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른 집에서 자가용에 정기적으로 드는 기름값과 보험료 이외에도 자동차 구입비에 따르는 감가상각비와수리비를 모두 합치면 다달이 몇 백 유로는 들 것이다.

이렇게 차를 빌려 쓰면 돈만 덜 드는 게 아니라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면허증을 따자마자 일어난 일이다. 물리 과제를 위해서 꽁꽁 얼은 겨울 밤길을달려서시골의 천문대에 갈 일이 생겼다. 첫 운전인데 아빠가 좀 따라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엄마인 내게 있었으나 남편은 혼자 보내도 괜찮을거라고 했다. 우리 집에선 간 큰 사람이 항상 이긴다. 그날 혼자 길을 떠나기 위해 차를 빌리러 간 아들은 차를 빼는 과정에서 기둥에 부딪치는 접촉사고를 내고는 집으로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조합에 전화해서 다른 차를 빌려서 가라고 조언했다. 혹시 사고로 인해 마음이 불안하다면 아빠가 나가겠다고 하자 아들은 괜찮다고사양하고 그 자리에서 전화로 다른 차를 빌려서 무사히 일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왔다. 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십년감수하고 남편을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사고처리비로 일괄지정된 300유로만 더 냈다. 조합에서 빌려주는 차들은 항상 정비가 잘 되어있고 행여 폐차 사고를 내도 300유로만 따로 더 내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이렇게 값싸고 편리한 제도를 다른 사람들은 왜 이용하지 않는지 우리 식구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대인의 자유와편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이런 좋은 제도가 왜 온 세상으로 무럭무럭 퍼져나가지 않는지 불가사의하다. 다른 일에선 똑똑한 사람들이왜 그럴까? 그러면서 우리보고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이상하다.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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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왕국답게 메르체데스 벤즈에 곰제리를 붙여 만든 예술품.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이 차를 타고 유럽 대장정을 거쳐 2007년의 카셀도쿠멘타에 참석했다. 뮌헨 시내 마리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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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조합에서 차 빌리는 모습. 전화나 인터넷으로 원하는 종류의 차를 예약한 후 주차장소에 가서 비번을 누르고 자동차 열쇠를꺼낸다. 집에서 가까운 주차장소의차가 다 나갔으면 좀 떨어진 곳에서 빌리면 된다. 이렇게 조합의 차가 서너 대씩 대기하고 있는 곳이 뮌헨에만70군데 있다.빌리는 장소가 멀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차를 사용한 후에 다시 자전거로 집에오기도 한다. (자동차 없이 사는 일에 익숙해서 굳이 자동차 면허증을 딸 필요성을 못 느끼는 아들에게 “우리는 지구상에 자동차가너무 많은 것을거부할 뿐, 자동차 자체는 인간에게 이로운 문명의 이기이므로 운전 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현대인의 덕목”이라며 면허증을 따도록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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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시내 마리엔 광장에는 자전거 택시도 있다. 승용차 금지 구역이라 갖가지 대중교통이 눈의 띔. 뒤에 보이는 세모 박공이 고딕양식의 구청사.


(레몬트리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