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평소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일이 하나 있다. 우리 부모님이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친가, 외가 쪽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고 계시고 친척들도 많은 걸로 봐서 두 분 다 고아는 분명히 아닌데 필경 복잡한 가족사에 의해서 고아원에 보내진 것 같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시앗을 보고 집을 나가신 후 막노동하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밥 해먹고 살림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아원에 사는 급우들의 도시락 반찬이 더 좋은 것이 너무나 부러워서 초등학교 5학년 때 고아라고 거짓말을 하고 고아원에 스스로 들어가셨다.

어머니는 유산문제로 배다른 언니 오빠들에 의해서 일찌감치 유배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중간에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나중에 어머니는 그 고아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독신여성이 데리고 가서 길렀다. 북한 피난민들이 이룬 농업공동체였다.

아버지는 교육에 관심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면서 초등학교 입학원서도 자신이 혼자 가서 낼 정도로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뒷골목에서 행상도 하고 깡패노릇도 하면서 독학으로 공부를 마쳤다.

우리 부모님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시스템의 덕을 본 사람들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는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일찌감치 고위공직자의 길을 승승장구 달렸다.

나는 어머니가 살던 농업공동체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어려서 우리집이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시를 준비하던 기간은 말도 못하게 가난했던 것 같다. 쌀이 떨어지자 집에서 기르던 개를 팔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는 결혼반지를 팔아 쌀을 샀는데, 그 쌀도 떨어지자 남이 몰래 개를 팔아서 쌀을 사다주었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가 통곡하며 다시는 개를 기르지 않겠다고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동생이 태어난 후 몸이 약한 어머니가 두 간난아기를 돌보기를 힘들어하자 예의 그 사회복지사 독신여성이 나를 바로 이웃에 있는 자기 집으로 자주 데리고 가곤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여성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이들을 언니, 엄마라고 불렀다. 나는 나를 키워준 독신여성을 이모 또는 엄마라고 부르며 자랐다. 이모는 동네에 있는 고아원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나도 원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형제들처럼 지냈다.

나의 성격 중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나는 이를 순전히 나를 길러준 이모와 할머니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를 믿고 사랑을 듬뿍 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나는 무척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힘으로 나는 아직까지도 남을 믿고 사랑을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우리는 농업공동체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왔다. 자식들을 대처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는 군식구가 많았다. 몇 년씩 함께 살다가 우리 아버지 손에 이끌려 예식장에 들어가는 아줌마나 언니들도 있었고 명절이면 놀러와서 며칠씩 지내다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 아버지께 늘 언니, 오빠, 형, 누나라고 불렀고 우리 형제들을 무척 귀여워하였다. 우리 부모님이 00 아저씨의 학비를 댄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아버지께 그 이유를 여쭈어보았더니 아직 우리가 어려서 학비가 많이 안 들으므로 다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거라고만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의 사연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들과 거기에 대해서 얘기해 본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독일에서 근무하셨을 때 미국에서 유학하던 친척 언니 오빠가 독일의 우리 집으로 놀러왔다. 워낙 복잡한 집안이라 어떤 친척관계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우리 부모님이 이들에게 그 어느 친척에게보다 정성을 기울여 극진히 대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들이 미국에 돌아갈 때 부모님은 용돈을 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들은 우리 부모님이 계시던 고아원을 운영하시던 분의 자손들이었다. 작년에 내가 한국에 갔을 때 그때 그 언니를 만나서 말했다.

“언니, 나는 우리가 정말 친척인줄 알았어.”
“얘는? 우리가 친척이지 그럼 아니니? 우리 할아버지는 육의 자식과 영의 자식을 가리지 않으셨어.”

내가 결혼해서 독일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 광부출신의 교포들이 교회를 짓는다고 해서 내가 도와드리러 갔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 도시에서 일박을 하게 되었다.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아저씨의 차를 타고 가면서 그가 아버지의 성함을 묻더니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혹시 애린원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어요?”
“아아, 네, 알아요. 우리 부모님이 계셨던 고아원이죠?”
“아, 아시는군요. 저도 거기 출신입니다. 여기 독일에도 형님 덕분에 왔고요.”
“어머나, 아저씨 그럼 우리 친척 되시네요.”

자식대인 내가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는 눈물을 흘릴 듯이 반가워했다. 쑥스럽게도 그날 나는 그 아저씨에게서 용돈까지 받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국제전화를 드렸다. xx 아저씨를 만났다고 말했더니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경계하는 말투로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과거를 안다는 걸 모르셨기 때문에 나의 반응을 불안해 하셨다. 나는 있었던 일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투로 자랑하듯 얘기했다. 아버지는 나의 반응에 적이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이래저래 내게는 친척이 많이 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현상은 피를 나눈 친척보다 물을 함께 나눈 친척이 내게는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피를 나눈 친척들과는 달리 물을 나눈 친척들은 우리 집안이 어려울 때에도 등을 돌리는 법이 없다. 나보다 어렵게 사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직도 나를 만나면 용돈을 주신다. 나는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하지만 그분들의 용돈을 기쁘게 받기로 했다. 왜냐면 가족관계가 어느 선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을 나눈 친척들을 통해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의 자녀들을 친동생들처럼 거두고, 이 동생들이 배낭여행이라도 나오면 나도 용돈을 줄 것이다. 그러다가 내 자식들이 한국에 어학연수라도 하러 들어가게 되면 내가 용돈을 주었던 동생들이 우리 아이들을 친척의 정으로 거두어 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우리 부모님들이 그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 그 덕분에 평생 남에게 넉넉하게 베풀며 살 수 있는 인성을 기르셨고, 그 덕분에 자식대인 우리들에게도 마음이 넉넉한 친척들을 많이 만들어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설이 존재했던 우리나라에 감사한다.


(2005년에 쓴 글입니다)

PS 아버지, 이 글을 발표하도록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께서도 용서해주실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