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를 보내며 + 모금 현황 보고
크리스마스 트리의 마지막 촛불이 타고 있다. 저것만 다 타고나면 나는 트리를 치우고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할 것이다. 마지막 촛불 아래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4대강사업을 막기 위한 공부를 하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쓰긴 했지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하지 못했다. 몇 군데 출판사와의 약속도 어겼다. 이유는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였다.
글은 못 썼지만 사실은 겪은 일도 많고 사연도 많아서 충만하고 행복한 한 해였다. 유치원에 출근하려고 새벽길을 나서면 어떤 때는 달님이 얼굴을 내밀고 말갛게 웃었다. 이자르강변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나는 바지가랭이를 타고 올라오는 새벽 바람이 제법 매서워졌다고 마음속으로 글을 썼다. 밤에 보육교사 수업을 마치고 공동묘지 담길을 따라 자전거로 집에 오는 길은 늘 행복했다. 뽀얀 가로등 불빛이 닿는 구간마다 소복히 깔려 있는 낙엽의 황금빛, 빨간빛이 참으로 찬란하다는 문장을 만들어 내 앞에 펼쳐지는 장면과 비교하곤 했다. 몇 주 후에는 가로등에 비치는 낙엽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겨울비를 맞아 날카롭게 번쩍이거나 싸락눈에 덮혀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낮에는 유치원에서 실습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길에 다니면서 빵을 먹거나 주로 공부시간에 하루의 칼로리 섭취를 다 했다. 공부시간에 뭘 먹으니까 피곤함도 달아나고 집중이 더 잘 되었다. 공부시간에 나는 시계를 자주 봤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것이 아까워서였다. 그간 궁금하던 것을 누가 정리해서 가르쳐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내가 처음에 유치원 선생님이 되기로 했을 때 나는 어디를 가던 2인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인자가 되면 책임감도 크고 서류도 만지고 사무도 봐야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줄어들 것이 염려되어서였다. 그러나 유치원에서 실습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실질적인 교육을 받다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유치원에서 실행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이란 사회에서 굳어버린 관습의 타성을 깨려면 내가 실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도 일도 슬렁슬렁 하면서 인생을 즐기려던 계획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집에 오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집에 오면 옷도 벗지 않고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국의 4대강사업에 관련하여 일은 끝이 없었다. 국민소송 날짜에 맞춰 자료를 번역할 때는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시 유치원에 출근한 날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그대로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저녁까지 계속해서 번역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보 건설의 폐해를 가장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서 독일 법정에서 무적무패의 전문가로 통하는 헨리히프라이제 박사의 글은 정말 어려웠다. 그가 쓴 글은 연방정부의 국책을 의논하는 전문가들과 소통하기 위한 글이라서 내용도 어렵고 문체도 어려웠다. 독일 대학 수리수문학 전공서적 역시 어려웠다. 그런 글을 한국의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번역하기 위해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머리에서 쥐가 났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여러 명이 번역연대란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와 함께 밤을 새웠다. 어떤 회원이 글을 올렸다. “이 문장 너무 어렵습니다. 독일어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요. 제 머리와 컴텨에서 동시에 김이 나서 거기에 뭐 찜쪄 먹어도 되겠다는.” 오밤중에 그 글을 읽은 나, 갑자기 눈 앞에 찐빵이 오락가락하며 출출한 속에 찐빵이 땡겨서 죽는 줄 알았다.
번역을 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면 재독한인들이 교류하는 포털사이트에 도움을 청했다. 그 사이트에 질문을 올리면 나보다 번역을 더 잘 하는 사람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나타나서 가르쳐줬다. 내 컴퓨터에는 액셀 프로그램도 없는데 액셀로 통계 낼 것이 많아서 쩔쩔매다 할 수 없이 그 사이트에 SOS를 쳤더니 어디선가 액셀 천사들이 나타나서 한 뭉텅이씩 들고 가서 금방 해결해줬다. 그 사이트에다 인터넷을 통한 협동작업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위의 찐빵 얘기를 썼다.
며칠 후에 남편이 웬 찐빵을 들고 들어왔다. 어느 교민 언니가 전해줬다는, 아직 채 식지 않아 김이 얇게 서린 봉지에는 “니가 좋은 일 하느라고 밤 새워 고생하는데 내가 다른 건 못해줘도 찐빵은 언제든지 만들어줄 수 있지.“라고 쓰여진 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날 하루종일 굶고 찐빵을 받아드는 나의 손이 떨렸다. 한입 덥석 베어물었더니 포근한 이스트 냄새가 피어오르며 난데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이 굴라쉬(맵고 짠 헝가리 스프)를 끓여 저녁을 차려줬다. 나는 굴라쉬 한 입 먹고 앙꼬가 든 찐빵을 한 입 먹었다. 처음에는 번갈아 먹다가 나중에는 찐빵에 굴라쉬를 막 찍어서 먹었다. 그때 찐빵이라고 쓰지 않고 찐만두라고 썼으면 굴라쉬랑 더 잘 맞았을 터인디… (떽! 앙큼해라.)
며칠 후에는 뮌헨 근교에 사는 다른 언니가 반찬을 전해주고 갔다. 내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대문간에서 전해주고 도망갔다. “4대강사업 막느라고 수고하는 게 고마워서… 공부한 사람이 그렇게 계속 노력해줘. 난 이렇게 도울게.” 봉지 안에는 밥만 지으면 끼니가 해결되도록 김치를 비롯해서 갖은 밑반찬이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 그리고 국민소송 모금 운동에 써달라는 돈 봉투가 들어 있었다.
4대강사업을 막기 위한 작업은 이렇게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면 앞에 나서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용한 응원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힘들다고 내 맘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밖에도 나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국민을 설득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은 나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친구의 검토를 받았다. 그 친구는 감정이입의 상태에 몰입해서 글을 읽어본 후에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좋아하겠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엔 부족하다'‘는 조언과 함께 글을 고쳐주곤 했다. 언제 부탁해도 마치 자기 일처럼 성심을 다하며 그 친구는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의 일이잖아요?”
이렇게 앞에 나서지는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국민소송은 올해 겨울에 국민의 패소로 막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를 염려했다. 나는 실망은 했지만 마음의 상처는 입지 않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목적은 ‘‘4대강사업을 막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 동기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동기는 단순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이고, 올해 나는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도리어 뿌듯하다.
사대강사업 덕분에 나는 번역연대에서 함께 번역하는 동지를 얻었고, 나 하나 어떻게 되어도 이 많은 정보들이 묻히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번역연대에서 새로운 협동과 창조의 세계를 경험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싶을 때 지구 저편에서 나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희망의 등불이었다. 단어도 떠오르지 않고 모든 것이 자신 없어서 포기하고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인 후에 다시 들어와 보니 어느새 내가 고심하다 팽개쳐둔 문장이 말끔하게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느닷없이 구원의 감정을 느꼈다.
내가 신세진 많은 분들이 도리어 ‘‘할 수 있는 일을 주어서 고맙다'‘고 내게 인사하듯이, 나 역시 혼자서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는 대신 무엇인가 행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주신 한국의 “4대강 국민소송단 변호사단+ 운하반대 교수모임+ 4대강사업저지범대위소속 환경운동가+ 국민소송의 원고들"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게 돈을 모아주시고 마음을 모아주신 국민 한 분 한 분에게 감사를 올린다.
새해에는 사대강사업의 진실이 더욱 널리 알려지고, 국민 모두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연히 들고 일어나 한 삽이라도 더 뜨기 전에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아기자기한 글도 올라오지 않는 블로그를 변함 없이 찾아주시는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금 현황 보고
4대강사업의 중단을 요구하는 국민소송을 위한 모금의 독일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2010년 1월초에 모금 계좌를 연 이후로 총 2485유로가 들어왔습니다. 880유로를 2010년 3월에 한국으로 송금해서 국민소송에 보탰고, 9월에 독일의 전문가를 한국으로 모시는 일에 1100유로를 독일 모금에서 보탰습니다. 한국의 방송국에서 독일 전문가에게 213유로를 드릴 일이 있는데 일이 지연되어 저희 모금에서 일단 먼저 내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잔액이 290유로지만 방송국에서 돈을 받으면 총 503유로가 되는 셈입니다. 모금액 덕분에 지난 가을에 독일 전문가를 한국에 모시는 일이 수월했습니다. 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크게 도움 주신 재독한국여성모임에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신문에 모금 광고를 내주신 프랑크푸르트 박정숙 박사님께도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지난 11월 6일에 뮌헨한인회 신순희 회장님과 재독한국여성모임 사대강 위원회 박정숙 박사님께 모금에 관한 모든 은행 서류를 보여드리고 모금액 감사를 받았습니다.
모금 운동을 다시 한번 하려고 합니다. 새해에는 한국에서 4대강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연대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예정이어서 해외에서도 조금이나마 정성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5유로도 좋고 10유로도 좋으니 동참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돈을 보내주시는 대부분의 독일 교포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선 단돈 10유로도 함부로 쓰지 않는 분들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큰 돈 보내지 마시고 작은 돈으로, 널리 참여해주시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4대강사업 중단을 위한 국민소송
Kt.Nr. 04 212 514 01
Commerzbank Muenchen
BLZ. 700 800 00
Name: Hea-Jee 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