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 겁쟁이도 절박한 순간에는
내가 공개적으로 4대강사업을 비판해 왔다고 해서 용기있고 당찬 여자일 거라 생각하면 오해다. 도리어 나는 겁 많고 소심한 편이다. 어린 시절 놀 때도 늘 몸을 사려 한번도 크게 다쳐본 적이 없다.
부모가 되어 아이들 데리고 스키장에 가서도 넘어져 다칠까봐 늘 설설 기다시피 탔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 나는 무서운 스키장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 유럽 최고의 여름썰매장에서도 브레이크를 꽉 잡고 살살 내려오는 통에 뒤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민폐를 끼친 적도 있다. 게다가 한국 드라마를 보면 폐인이 된다기에 고지식한 나는 그 유명한 드라마 한 편 보지 못했다.
나는 4대강사업을 고발하는 글을 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이를 악문다. KBS 방송국 간부가 나에게 전화해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을 때는 공영방송의 막강한 법무팀과 재판을 벌이다가 우리집 전재산을 날리고 남편에게 이혼당하는 시나리오까지 떠올렸다. 뮌헨 교포들에게 내가 마련한 4대강사업 설명회 뒷풀이 자리에서 발언했던 많은 원로 교포들에게 독일주재 한국영사관이 전화를 걸어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지?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고했을 때, 나는 뮌헨 교포사회에 서로가 서로를 국정원 끄나풀로 의심하는 풍조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겁 많고 소심한 내가 지난 4년에 걸쳐 일관되게 4대강사업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걱정과 염치에서다.
독일은 선조들이 강바닥을 파고 보를 세운 댓가로 홍수 증가와 수질 악화에 시달리다 못해 강을 자연 상태로 복원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명색이 독일의 하천사업을 모델로 한 하천복원이라면서 독일이 자연에 무지했던 시절 벌인 막가파식 하천개발과 똑같은 방식으로 4대강사업을 했다. 독일의 경우에 비추어봤을 때 환경 재앙과 경제 파탄은 불 보듯 뻔했다. 나는 그렇게 걱정스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여기에 바쳐온 내 개인적인 희생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4대강사업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죄 없는 후손에게 재앙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모르느니만 못하다는 간단한 이치가 나를 움직이게 했을 뿐이다. 몰라서 동조하는 이들과 알면서도 묵인한 이들을 통해 나치 정권이 태어나고 유지되었던 역사를 나는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
사실 나의 글쓰기는 점점 집요해져 왔다. 날이 갈수록 오기가 커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의 거짓말에 고지식하게 꼬박꼬박 대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글을 전부 내리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KBS 간부에게도 정면돌파하겠다며 맞섰던 것도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옳은 길인 줄 알면서 무섭다고 다른 길로 갈 만한 주변머리가 없어서였다. 뮌헨 교포사회의 화합이 나 때문에 깨질까 하는 염려는 여전하지만 지금 이렇게 밝히는 것도 툭 하면 전화해서 협박하는 해외 공관의 행태를 고발해서 후배 교민들에게 건강한 교포사회를 물려주는 일이 당장의 화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이 4대강사업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사람들에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즉시 나는 그간 바빠서 미루어 두었던 비판글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의 4대강공사 현장에서 직접 뛰는 사람들에게 내려치는 매를 막아줄 힘은 없지만 옆에서 같이 맞아주며 매를 분산시키겠다는 정도의 용기는 하룻밤 고민하는 사이에 생긴다.
진실은 용기 있는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이름 모를 어느 겁쟁이 아가씨에게 배웠다. 남편에게 맞고 살던 어떤 아주머니가 있었다. 가장 무섭게 맞은 것은 집안이 아니라 큰 길거리에서였다. 차가운 아스팔트에 뺨이 눌린 채 남편에게 자근자근 밟히며 맞고 있는 데도 사람들은 모두 그냥 지나쳤다. 20분이나 이렇게 맞으며 죽음의 공포를 느낄 무렵 한 아가씨가 나타났다. 그 아가씨는 한 대만 더 때리면 경찰을 부르겠다며 112가 찍힌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 골목길로 지하철역으로 따라다니며 가로막았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장부가 아니었다. “그 아가씨,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우리 신랑이 주먹을 쥐고 때릴 듯하면 주저앉아서 엄마야~~ 그랬다니까.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거 같애. 핸드폰도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게 눈에 보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급기야 이 아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경찰을 호출하는 것을 본 남편은 서둘러 자리를 떴고 아주머니는 힘 없고 겁 많은 아가씨가 그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회고했다. 안 그랬으면 그날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길거리에서 그렇게 비참한 꼴을 보이고 살아갈 기력은 없었을 것 같다고. 이름도 묻지 못한 채 경황 없이 아가씨와 헤어졌지만 아주머니는 그날 이후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다른 아내가 맞는 것을 보면 뛰어들어 말릴 용기까지 생겼다고 한다.
(산하 김형민 PD의 “위대한 겁쟁이 아가씨"에서. 전문 보기.)
평범한 사람도 자긍심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말을 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 있다. 저 위대한 겁쟁이 아가씨를 생각하면 나 같이 겁 많고 소심한 사람도 비겁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돈다. 소심증을 한번 극복하고 일어선 사람에겐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힘 있는 자가 아무리 망치를 휘둘러도 여기를 치면 저기서 솟아오르는 두더지 떼의 끈질김을 당할 수 없다. 힘 없고 겁 많은 사람도 고지식하게 끈질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지.
(독일에서 발간되는 월간문화지 풍경 2월호에 송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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