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련의 댄서
젊었을 때 나는 춤추기를 참 좋아했다. 디스코 음악에 맞춰 혼자 추는 막춤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파티가 있으면 제일 먼저 춤추기 시작해서 한 곡도 쉬지 않고 제일 마지막까지 춤만 추다
왔는데, 그렇게 춤으로 꼬박 새는 밤은 피곤하지도 않았다. 신들린 사람이 한바탕 굿이라고 하고난 듯 시원하고 후련했다.
그러다가 남편을 사귀면서 나의 춤사랑은 막을 내렸다. 남편은 쿵쾅거리는 디스코 음악이 싫다는 핑계로 소년시절에 디스코텍에 한번 가보지 못한 꽁생원 청년이었다. 춤을 안 즐기는 게 아니라 전혀 못 췄다. 같이 파티에 가면 나는 신나게 춤추고 저는 혼자 심심하니까 언젠가는 내게 시비를 걸어서 꼭 파토를 내곤 했다. 헤어지니 마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린 워낙 상극인지라 자석처럼 딱 붙어버렸다. 그와 결혼해서 아이들 낳아 키우며 함께 늙어가는 사이에 나의 춤사랑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이들이 다 큰 후에 우리는 일명 댄스스포츠라고 불리는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몇 년은 재미있었다. 우리는 집에서까지 가구를 옆으로 치워놓고 열심히 연습했다. 매주 댄스학원에서 열리는 연습파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춤추고 오면 기분이 상쾌했다. 춤 실력은 날로 늘었고 부부 금슬도 좋아졌다. 내가 차차차 장단에 맞춰 엉덩이로 8자를 그리며 눈웃음을 살살 흘리면 어두운 조명속에서 남편의 눈빛이 불량스럽게 반짝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춤만 췄다하면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동작이 잘 안 되면 서로 파트너 탓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실력이 늘면 늘수록 호흡이 잘 맞아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어긋나기 시작하니 황당했다. 나는 춤추러 갈 시간만 되면 기분이 미리 나빠지려고 했다.
남편은 시간만 나면 참고서를 들여다보고 비디오를 보면서 동작과 스텝을 연구해서 수첩에 부지런히 메모하는 사람이다. 파티에서까지 춤추다 말고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보는 것까지는 좀 챙피하기는 하지만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서 눈 감고 춤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 둘, 셋, 넷” 하며 큰 소리로 박자를 센다거나 “여기선 오른쪽 어깨를 앞을 빼야지.“하고 나를 밀쳐서 흥을 확 깰 때는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왜 밀고 그래?"
“이 스텝을 아직도 못 외우나? 당신은 도대체 성의가 없어."
“왜 레이디 보고 스텝을 외워서 추래? 레이디는 남자가 리드하는 대로 추는 거지. 자기가 리드를 못해서 그런 건데 괜히 내 탓을 하고 있어."
“내가 리드를 잘 했는데도 당신이 알아채지 못하고 뒤로 간 거잖아?"
“당신 배가 나와서 자세가 나쁘니까 내가 알아챌 수가 없는 거야.”
우리가 초보자였을 때는 박자에 맞춰 스텝만 잘 밟아도 그럭저럭 흥겹게 출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스텝이 복잡해지고 스타일이 정교해지게 되면 춤 추는 자세가 중요해진다. 사실 우리 부부는 함께 춤추기에는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남편은 배가 나왔는데 우리는 키 차이가 제법 나기 때문에 마주 서면 그의 배와 내 가슴이 딱 붙어버린다. 서로의 오른쪽 갈비뼈만 맞대고 두 몸이 착착 감기며 돌아가야 하는데 배와 가슴이 맞붙어버리니 어쩌란 말이냐?
게다가 남자가 가슴을 쭉 펴고 머리를 반듯이 들어야 레이디가 우아하게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허나 남편은 늘 고개를 숙여 나의 상체를 압박하니 도대체 나는 갑갑해서 춤을 제대로 출 수가 없었다. 여러 댄스 선생님들이 무던히도 지적했건만 남편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내가 한국의 4대강사업 막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와 추는 춤에 성의가 없는 거라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도 갱년기가 있음이 틀림없다. 남편은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화를 참지 못하는 못된 버릇까지 생겼다. 평소에는 서로 따로 노니까 싸울 일이 없는데 춤만 추면 싸움이 일어났다. 나는 양양거리며 그의 화를 돋구고 그는 참지 못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 나는 춤추다 말고 부르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댄스학원에서도 ‘‘춤 잘 추는 쌈쟁이 부부'‘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제는 춤추러 갈 시간만 되면 기분이 미리 나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혼하고 싶을 정도로까지 상황이 악화됐다.
춤을 그만둘까? 각자 파트너를 구해서 따로 춤출까? 아예 댄스 경연대회를 목적으로 개인지도를 받으며 강도 높게 연습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라나? 차라리 확 이혼을? 나는 마음 속으로 법륜스님께 즉문즉설을 구했다.
‘‘스님, 춤 출 때마다 남편과 싸워서 괴롭습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니 지금 내 약올리나? 파트너도 없고 춤도 못 추는 내한테 지금 너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기가? 호강에 받쳐 오강 깨나?''
‘‘그게 아니라 정말 심각합니다’'
‘‘아, 그라모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집을 나오등가 그냥 살살 비위 맞춰주믄서 살라모. 그것도 못하믄서 무신 결혼 생활에 춤까지? 쯧쯧.’’
내가 답을 모르니 내 마음 속의 스님도 이렇게 불친절하시다. 그래서 아침마다 108배와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일지를 보니 이런 문장도 보인다. “춤추면서 그에게 바락바락 화내지 않겠다는 기도서원을 세웠으나 기도하는 사이에 다 잊어버렸다.” 우리는 이렇게 지지고 볶는데 속 모르는 사람들은 10년을 함께 춤추는 우리가 잉꼬부부인 줄 알고 댄스 경연대회에 나가 보란다.
나는 댄스 선생님을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놨다. 당장 춤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선생님은 남편을 불러서 “혜지는 문제가 없는데 네 자세가 나빠서 그렇다.“고 화끈하게 얘기해줬다. 거 봐. 난 그간 받은 구박이 서러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양처럼 순해졌다.
춤출 때 여자는 그림, 남자는 액자라고 한다. 남자가 든든하게 틀을 잡아주면 그 안에서 여자가 아름다운 동작을 연출해서 예술작품이 태어나는 것이다. 내 액자는 좀 찌그러졌다. 이왕 찌그러진 거 이렇게 조용히 찌그러지니 좀 좋아?
(월간문화지 ‘‘풍경’’ 4월호에 기고한 글을 다시 손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