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이혼, 하안거
요즘 우리집은 여름 휴가 준비로 분주하다. 집안에 자전거가 들어와 해체되어 있고 남편은 온갖 공구들을 늘어놓고 자전거 손 보느라 바쁘다.
자기는 마음이 바쁜데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게 불만인지 자꾸 쓸데없이 말을 걸어오면 나는 냉큼 일어나 짐 싸는 시늉이라도 한다. 텐트와 침낭을 챙기고 불 하나 짜리 꼬마버너와 플라스틱 접시를 보란 듯이 야무지게 싸놓는다. 매년 하는 일이니 이제는 이력이 나서 손발이 척척 맞는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선 잉꼬부부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여행만 떠나면 갈등이 잦았다. 특히 자전거여행에선 자주 다퉜다. 묵묵히 페달을 밟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다보면 앞에 가는 남편과의 간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가 무언가 불만이 있어서 일부러 천천히 타는 거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화를 부글부글 끓이고, 나는 남편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 짐작하고 미리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퍼붓곤 했다. 사실은 체력 탓이었다. 나는 체력을 다 소진해서 기분이 언짢았는데 남편은 힘이 펄펄 남아돌아 욕구불만이었다.
아무리 대화해도 개선이 없고 미움만 쌓이던 어느날 나는 남편에게 다시는 자전거 여행을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내가 알아서 나만의 휴가를 즐길 테니 너는 젊고 힘 좋은 여자를 구해서 같이 자전거를 타던가 말던가 맘대로 하라고 했다. 내가 이혼하자고 말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견했건만 남편은 찰떡처럼 알아듣고 절망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지 그제서야 나의 고충을 헤아려본 남편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2인용자전거 탄뎀을 사자는 것이다. 나는 기겁해서 내가 탄뎀 탈 성격의 사람으로 보이냐고 단번에 거절했다. 각자 따로 타도 서로 안 맞아서 티격태격인데 같이 딱 붙어서 탄다는 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남편은 장장 2년을 저자세로 나를 설득해서 결국 최신형 탄뎀을 샀다. 시험삼아 2년만에 함께 떠난 첫 탄뎀여행에서 우린 정말 이혼할 뻔했다. 우리가 맞춰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전하고 소심하게 자전거를 타는 나에 비해서 남편의 주행 스타일은 거칠었다. 내가 무섭다고 좀 조심하라고 외치면 남편은 내가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아무런 결정권 없이 그냥 페달만 밟으며 그에게 종속되어버린 나는 마치 우리에 갖힌 맹수처럼 분노했다. 앞뒤로 딱 붙어 앉아서 끊임없이 말로 싸우니 남편 또한 내 입을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30년 부부생활에서 서로 보여주지 않았던 못된 면이 자전거 위에서 마구 드러났다.
하지만 환경보호를 지상과제로 정한 우리 부부에겐 자전거 여행 밖에 휴가의 대안이 없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이혼을 할망정 자동차나 비행기 타는 휴가는 우리 사전에 아예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혼도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서로 이 만큼 환경보호가 생활습관으로 함께 굳어진 파트너를 다시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신념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대안이 없으니 노력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도 같은 일로 싸우다보니 서로 알아서 맞춰주는 센스가 연륜으로 생긴 것일까?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월이 가면서 언제부터인가 내가 탄뎀 타기를 즐기게 된 것이다. 함께 다닌 거리가 만 킬로미터가 넘으니 슬슬 적응이 된 것 같다.
저녁에 자전거에서 내리면 남편은 녹초가 되어 오늘 하루 열심히 싸운 사냥꾼의 포만감을 만끽하고, 나는 아직 힘이 남아돌아 경쾌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는 점이 탄뎀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관계가 호전되니 앞뒤로 딱 붙어앉아 종알종알 대화하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 아이들이 다 커서 집을 떠나고 두 양주가 남아 연애시절에 했던 자전거 여행을 다시 지속하니 신혼 기분까지 든다. 이제는 퇴근하고 돌아온 평일 저녁에도 같이 탄뎀 타고 한바퀴 돌자고 내가 조르는 상황이 되었다.
일년에 한번씩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철칙으로 굳었고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순기능을 경험하고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3주일을 완전히 바깥 공기 속에서 지내다 오면 몸의 면역력이 강화되어 그해 겨울은 비교적 감기 없이 지낼 수 있다. 살면서 쌓인 스트레스 호르몬이 장시간의 운동을 통해 해소되는 면도 있을 것이다.
내가 특히 즐기는 것은 텐트 생활이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호흡하며 잠을 청하는 순간의 쾌적함이라니… 아침에 남편이 끓여주는 인스턴트 커피를 물안개 피어나는 호숫가에 앉아서 마시는 기분도 좋고, 비 오고 추울 때 폭신한 오리털 침낭 속으로 파고 들어가 후둑후둑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맛도 낭만적이다. 비를 막아주는 텐트와 따스한 침낭을 가진 나는 그 순간 얼마나 완벽한 부자인지… 하룻밤에 20유로 안팍의 유료 야영장에 있는 모든 시설이 우리에겐 호사스럽다. 50센트짜리 동전을 넣으면 3분이나 더운 물이 나오는 샤워가 낭비로 느껴질 때는 그냥 찬물로 씻는다. 먹성이 갑자기 바뀌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무조건 열량 높고 양 많은 싸구려 음식이 제일 반갑다. 소량으로 몇 번에 걸쳐 우아하게 서빙되는 고급음식을 대하면 성에 안 차서 이런 음식이 인류사회에 왜 존재하는지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자전거 여행의 특성상 최소의 물건으로 생활해야 하는 미니멀 라이프는 나의 중심을 잡아준다. 흥청망청 소비하며 지구를 말아먹는 세속적 생활습관을 피해갈 능력과 자신감을 준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변기가 두 개나 있는 우리 집이 마치 궁궐처럼 호화스럽게 느껴진다. 연초에 정토회 인도 성지순례에 참여했을 때 소박한 숙소 환경이 내게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텐트에서도 편안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그 어떤 숙소에서도 침낭에 들 때 기어들어 가지는 않았으며 밤에 화장실에 갈 때도 비를 맞을 필요가 없었으니 난 진심으로 감지덕지했다.
법륜스님은 여름철이면 모든 사회활동을 끊고 칩거하며 단식하고 명상하는 하안거에 들어가신다고 한다. 하안거는 지난 일 년 간 활동하면서 쌓인, 몸과 마음의 독소를 빼내어 청결하게 하는 기간이라는 법문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나의 연례행사가 된 자전거 여행도 하안거와 같은 의미를 갖지 않을까? 삶의 군더더기를 벗어던지고 담백하게 본질을 살아냄으로써 다시 속세에 나왔을 때 망설임 없이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안거.
이제 60줄에 들어선 우리 부부는 은퇴에 대한 계획을 즐겨 세운다. 둘 다 적성에 맞는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지만 너무 늦게 은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인 탄뎀살이를 실현하려면 어느 정도 체력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한 탄뎀살이란 계획을 딱 세워 정해진 날짜에 떠나서 귀가하는 여행이 아니라, 세월아 가거라 말거라 인연 닿는대로 다니는 무기한의 탄뎀여행을 뜻한다.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그렇게 억세게 한번 굴러보고 시작하는 은퇴생활은 매우 건전하고 건강할 것이다. 노년에 갑자기 확 줄어버린 수입에 대한 불안감 대신, 이렇게 많이 가짐에 대한 감사함으로 계속해서 검소하게, 베풀며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선사할 것이라 기대한다. 뒤늦게 탄댐살이 하다가 이혼하지만 않는다면…
(2019년 여름, 녹유 뉴스레터에 송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