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호주에 간지 벌써 4년이 되었다. 뮌헨으로 출장온 호주 청년을 데이팅앱을 통해 만나 딱 일주일 사귀고 난 후,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 호주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좋은 남자면 다행이고 나쁜 남자면 헤어지고 다시 오면 되지, 아무려나 인생에 좋은 경험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딸을 아주 잃는 것처럼 슬퍼했다. 자식은 한번 멀리 떠나가면 그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거라고 했다.

“그럼 어때?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나도 그랬잖아."
“그럼 어떻다니? 걔를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건데 괜찮다고?"
“뭘 영원히 못 봐? 가끔은 올 텐데."
“꽥! 가끔 오다니? 그럼 안 되지. 한 사람에 호주에서 독일까지 비행기 타고 왔다 가면 이산회탄소를 몇 톤이나 배출하는 지 알아? 5,6톤이야, 5,6톤!"
“꽥! 그렇다고 집에도 오지 말래?"
“그럼 당연히 오지 말아야지. 갔으면 거기서 살아야지. 5,6톤은 인구 오륙십 명의 아프리카 마을 전체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수치랑 맞먹는다구."
“그래도 그렇지. 오지 말라니? 애한테 그딴 소리 했단 봐라!”

딸은 부모의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들뜬 마음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다. 모든 일이 순조롭지도 않았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딸은 그 곳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딸이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더라도 호주에서 아주 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식의 행복을 부모가 책임져 줄 수 없는 엄연한 진실 앞에서 나는 내 맘에 들고 말고의 여지를 없앴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로서 애틋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딸이 고생할 때마다 멀리서 나 혼자 가슴 졸였다. 이제 딸은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거쳐 취직도 하고 안정을 찾았다.

그 동안 딸은 남자친구와 함께 두 번 다녀갔다. 제 아빠의 성격을 잘 아는 딸은 제가 다니던 대학에 처리할 일이 있다느니, 남자친구가 생일선물로 비행기표를 사줬다느니 핑계를 대가며, 그러나 제 맘대로 왔다. 딸이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난 늘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남편은 내 앞에서는 기후변화 운운하며 화를 냈지만 막상 아이들이 집에 오면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구두쇠인 줄 알았는데 뭐든지 아낌없이 퍼줬다.

우리는 딸과 일년에 한번쯤 소포를 주고 받는다. 나는 원래 명절이나 생일에 선물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이다. 선물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뭘 사야 할지 몰라서 매우 막막하다. 그 대신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 눈에 보이면 너무 반가워서 무슨 날이 아니라도 그냥 사서 선물한다. 엄마가 이러니 우리 가족 전부 선물문화에 미숙하다. 그러나 돌연변이 우리 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저 혼자서 적당한 선물을 정성껏 준비할 줄 알았다. 호주에 가서도 돈도 없으면서 일 년에 한 번은 비누나 과자같은 소소한 물건을 꾸려서 보냈다. 딸이 보낸 소포를 풀어보며 나는 우리 딸이 거기서 이런 물건을 쓰며 살고 있구나 싶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얘가 말은 안해도 고향이 그립구나 싶어서 가슴이 아렸다. 그래서 나도 딸에게 소포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주로 딸이 예전에 잘 먹던 과자나 젤리, 감자칩을 잔뜩 보내주면 남자친구는 딸이 소포를 풀어보며 황홀해하는 동영상을 찍어서 보내곤 했다.

올해도 나는 호주로 보낼 소포를 꾸렸다. 지난 여름에 딸이 독일에 왔을 때 남자친구 어머니께 드린다고 포켓커피라는 초콜렛 종류를 사러 다니다가 겨울에만 파는 계절음식이라 못 구했던 일이 생각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부부는 눈에 불을 켜고 포켓커피를 찾아다녔다. 남편이 나보다 더 열심히 찾아다니더니 어느날 드디어 발견했다. 나는 딸이 좋아하는 과자와 젤리의 이름을 잔뜩 적은 종이를 들고 여러 마트를 다니면서 소포에 넣을 물건을 사다 날랐다. 웬일인지 남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알디에서 바움쿠헨이란 케익을 사려고 집어드는데 남편이 갑자기 화를 냈다. 나는 남편이 부르르 화를 내면 놀래서 일단 맞춰주는 버릇이 있는지라 얼른 다시 내려놓았다. 억울한 마음으로 계산대 앞에 서는데 순간적으로 깨달음이 왔다. 오오 내 업식! 나는 성큼성큼 되돌아가서 바움쿠헨을 들고 왔다. 아무 말 없이 카트에 넣으니까 남편도 아차 싶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내겐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면 순간적으로 주눅이 들어 수그러드는 업식, 언제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하도 오래되어 내 성격의 일부가 되어버린 습관이 있다. 나는 이런 내가 싫었기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 전열을 가다듬어 와아아아 공격해서 어리둥절한 적을 곱으로 응징하고 전쟁을 장렬하게 마무리짓곤 했다. 나의 이런 행동패턴이 사소한 일을 키워서 인생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고치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법륜스님이 100일을 정진하면 내 꼬라지가 보이고, 1000일을 정진하면 업식이 바뀐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솔깃하여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백팔배하고 명상하는 생활을 거의 3년, 즉 1000일 가까이 하고 있는 요즘, 정말로 아주 가끔씩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큰 소리에 자동 반응으로 주눅드는 그 순간은 놓칠지언정, 그 순간 느꼈던 억울하고 애매한 감정이 점점 자라 분노의 불꽃으로 피어오르기 직전에 알아차리고 멈추는 기적이.

그때 내가 알디에 바움쿠헨을 두고 왔다면 난 두고두고 남편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려나 자기 방식으로 의사를 드러내 표현했고, 또 난 내 의지를 내 맘대로 관철시킨 뒤라 우리는 속에 응어리가 없어서 도란도란 대화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아까 왜 바움쿠헨 사지 말랬어?"
“멀리 보내는 건데 알디에서 사는 게 싫었어. 난 이왕이면 고급 케익을 사주고 싶었거든."
“오오, 그래? 나는 알디 것밖에 모르니까 자기가 좋은 것 좀 사와 봐.”

나는 ‘알디가 어때서? 딸애는 자기가 먹고 자란 음식이 그리운 건데 갑자기 생뚱맞게 웬 고급 케익? 웃긴다!‘하는 말을 카푸치노 거품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며칠 뒤에 남편이 뮌헨에서 제일 비싼 바움쿠헨을 수제품으로 만들어 파는 베이커리를 찾아냈다고 의기양양해서 나보고 같이 가보자고 했다. 알디 제품보다 8배나 비싼 바움쿠헨을 사며 나는 남편에게 나도 하나 사달라고 했다. 이게 정말 돈 값을 하는 건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실험을 하기 위해 나는 알디에 가서 바움쿠헨을 하나 더 사왔다. 한 사람씩 번갈아가며 눈을 가리고 두 제품을 먹어보고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알아보는 테스트를 해봤다. 맛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방금 자기가 어떤 제품을 먹었는지도 알아맞추지 못했다. 그래도 비싼 거니까 재료는 좋은 것을 썼겠지 하며 성분을 봤더니, 비싼 수제품 바움쿠헨에도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싸구려 팜유가 들어있었다. 에이 뭐야, 또 속았잖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는 바가지 긁는 것도 잊어버리고 남편과 눈을 맞추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푼수 마누라가 있나?

소포를 포장하며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알디제와 고급 바움쿠헨을 둘 다 넣었더니 5 kg 한도를 살짝 초과했다. 하나를 빼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남편은 아주 단호했다.

“당연히 하나를(이라고 말하고 ‘알디를’이라고 생각하심) 빼야지. 비행기로 보내는 건데."
“(아유 구두쇠, 돈이 아까우신가?) 그럼 배로 보내는 건 어때? 선편은 송료가 싸니까 10kg짜리 소포를 보내도 가격대가 지금이랑 비슷해. “
“배로 보내면 적도를 통과하는 사이에 포켓커피가 다 녹을 거야."
“아참, 그렇지. 그럼 이왕 초과했으니 과자를 좀 더 사서 10 kg 꽉꽉 채워서 보내자. 큰 소포를 받으면 얘가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꽥! 미쳤어? 이까짓 싸구려 과자를 10 kg이나 비행기에 태워보내야 되겠어?"
“꽥! 이까짓 싸구려 과자라니? 애한테는 고향 음식이고 향수야.”

나는 엉겁결에 소리는 같이 질렀지만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아, 그랬구나. 남편은 포켓커피와 바움쿠헨 하나만 항공편으로 보내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내가 5kg 소포의 한도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많이 사나르는 것이 불만이었구나. 나는 나대로, 괴팍한 아빠 때문에 남들처럼 집에도 매년 다녀가지 못하는 딸이 측은해서 뭐라도 아이의 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거라면 풍성하게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소포가 딱 5 kg이 되도록 사탕 알을 빼어내는 것으로 합의했다. 남편은 내가 10kg 소포를 고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을 것이고, 나는 남편이 5 kg 한도마저 채우지 말자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며칠 후, 나는 `붉은 지구’라는 환경 다큐멘터리를 온라인 정토회 친구들과 함께 보았다. 저명한 환경학자들이 30년 전에 예상한 환경위기 시나리오가 지금 시기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그건 이들의 경고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구온난화가 같은 템포로 계속 진행되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해져서 남편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지금 환경위기 상황이 12시 5분전이라 그러는데, 난 암만 생각해도 지금이 12시인 것 같애."
남편이 대답했다.
“아니 벌써 12시 10분이야.”

나는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30년 전의 시뮬레이션이 현실과 딱 맞아 떨어진다는 말은, 그간 인간의 행동양식에 아무련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고, 그것은 우리가 파멸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이제부터 자각해서 가속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공룡처럼… 지구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한 종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단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인류가 파멸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불공평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약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고통을 겪을 것이고, 가해자들은 끝까지 돈의 힘으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우리 세대가 마지막 순간까지 누릴 것 다 누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은 후, 아무 죄도 없는 후손들은 엄청난 고통 속에 어떻게든 재앙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좌절할 것이다.

내가 남편을 알고 지낸 40년동안 남편은 일관되게 생각하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일관되게 실천해왔다. 나는 그런 남편의 신념을 내 필요에 따라 쪼잔하다거나 답답하다고 흉보며 ‘성격이 그렇게 나쁘니 누가 네 말을 듣겠냐’고 쫑알거리곤 했다. 그러나 12시 10분을 맞은 지금, 남편의 울화를 이해하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왔다. 공멸을 경고하는 엄연한 과학 앞에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을 40년이나 지겨보자니 남편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이젠 ‘성격이 나빠질 만도 하지’하고 품어주는 자비심마저 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거리로 나가 피켓을 들던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글을 쓰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집 겨울철 실내온도를 18도에서 16도로 낮추겠다는 나의 결심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서만 다짐했다. 자기가 드디어 마누라를 사람 만들었다고 동네방네 우쭐댈 것이 보기 싫어서였다. 그러면 꽁하며 미워하는 나의 업식이 다시 발동할 것이 뻔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