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들은 모모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모모는 물론 가명이고, 옆의 사진도 아니다. 앞으로 가끔씩 블로그에 모모 일기를 정리하고 싶어서 몇 달 전에 내가 친구들에게 쓴 글로서 모모에 대한 소개를 대신한다.

여러분 안녕?

저 여러모로 잘 지내요. 근간에 집을 자주 떠나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을 뿐. 오래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가족들이남긴 살림의 흔적이 낯설고, 가족들과도 약간 서먹서먹해요. 심지어는 일에서 만난 사람들 꿈을 꾸다 얼핏 잠에서 깨어 옆에 누운신랑의 얼굴이 보이면 “아아, 이 이는 누굴까?“하고 어리둥절할 지경이어요.

같은 전공의 일이라도 여태까지는 늘 혼자서 하는 일을 해왔는데 요즘 한 일들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었어요. 하기 전에는오래간만에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에 심적으로 부담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색다르고 즐겁네요.

제가 전공일 이외에도 다른 일을 하나 벌여놓았는데 오늘은 그 얘길 해 드리죠.

자식들 다 키워놓고 쉰줄에 들어서는 저는 이제 막 피는 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십 년 동안이나 크게 죄 짓지 않고 성실하게적응하며 살았으니, 남이 보면 웃을까 몰라도 제겐 성공의 인생입니다. 숙제를 다 마쳤으니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비상하려고기지개를 켜며 희망에 차있지요.

비상하려면 몸이 가벼워야 하니까 인생을 정리해야 합니다. 새로이 취할 것과, 과감히 버릴 것과, 계속해서 가꾸어야 할 것을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글만 쓰라면 참 좋겠다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또 다르더군요.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니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정신건강상으로도 나쁘더라구요.

그간 건물조사 현장에서 노가다 뛰는 일은 육체노동이란 면에선 매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늘 혼자서 하는, 외로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사고의 위험도 많아서 한 건 끝날 때마다 이게 과연 오래 할 가치가 있는일인지 고민이 되었어요. 요즘 들어 일거리도 점점 줄어드니까, 언젠가 더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에 계속해서 매달리는 제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노가다 외에도 육체노동 중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뭣일까 생각해 봤어요. 어떤 일이라도 내가 잘하는 일이라야성취감을 얻으니까요.

사람 돌보는 일이더군요. 그래서 양로원, 병원, 유치원 등등 두루두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장애인 돌보는일이었어요. 자원봉사로 일하는 단체도 있었지만 저는 적은 돈이라도 보수를 주는 곳을 택했어요 (한 시간에 8유로=만 원 상당 ). 노가다 뛰는일 만큼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새 직업이라 내세우며 일하고 싶어서.

몇 달 후에 연락이 왔어요.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어서 말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네 살짜리 모모 군을 일 주일에 한번씩유치원 운동시간에 참여시키는 일이 제게 주어졌어요. 다른 애들이 뛰면 저는 모모를 스케이트 보드에 눕혀서 밀며 함께 뛰었고,아이들이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면 저는 모모를 안고 함께 춤을 췄어요. (이 유치원은 일반 아이들이 다니는 평범한 유치원입니다. 하지만 장애아 통합교육을 하는 일반 유치원이 독일에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이 유치원에서도 모모가 아마 첫 케이스인 것 같고요.)

모모가 저를 신뢰하는지는 표현을 할 수 없는지라 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아이들은 금방 저를 따르게 되었고, 그러면서 저의반쪽인 모모를 똑같이 좋아하게 되었죠.

아이들은 다름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편견이 없더군요. 한 사람씩 북을 치게 할 때 모모차례가 되면 모모는 주먹을 쥘 줄 몰라서 손가락으로 북을 긁어요. 그 후 아이들은 전부 따라서 북을 긁지요. 아이들은 앞으로모모처럼 스케이트 보드에 누워 밀어달라고 할지도 모르고, 모모처럼 멋지게 배를 밀며 기어다니는 연습을 할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날, 모모가 매일 유치원에 오게 되면 일반 유치원의 일상에 지장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던 유치원 측에선 제가 데리고오는 한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통보를 내렸어요. 그날 저는 집에 와서 식구들에게 말했어요. 학술논문이 책으로 나온 것만큼이나제가 성취감을 느낀다고요. 식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일이 더 훌륭한 일이라며 축하해 줬어요.

이제 모모는 매일 오후에 유치원에 다니고 있어요. 매일 하는 건 제게 무리라서 저는 일 주일에 두 번 데리고 갑니다. 나머지 세 번은 대체복무 하는 청년이 와서 도와 줍니다.제 보수도 시의 아동부에서 나오는 거니까 모모에게 가외로 들어가는 보조교사 비용은 국가부담이지요. (제가 부지런하다고 오해하실까 봐 덧붙이는데요, 다른 일을 대폭 줄였으며, 행여 새로운 일이 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모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모모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모모에게 적응하는 상황도기록하고 있고요. 모모가 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를 깨달은 일은 제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큰 배움이어요.

제가 살면서 항상 절실하게 느끼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거죠. 언어가 같아도 느끼는 점이 서로달라, 다른 것을 보며 같다고 착각하고 상대방을 무시해요. 그러면서 스스로 상처 받습니다.

우리 유치원 아이들은 곧 모모의'‘다름'‘에 적응하여 모모와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고, 그 후 이 아이들에겐 이 ‘‘다름'‘의 차이가 좀 더 적은 딴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인간이 서로 다름'‘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서로 다름'‘에화내거나 슬퍼하지 않고 ‘‘서로 다름'‘을 극복해서 소통하는 ‘‘당연한’’ 노력을 바치니까요.

모모의 장애를 ‘‘서로 다름'‘으로 인정하는 심성을 가진 아이들은 장애가 없는 아이들 간에 존재하는 강함과 약함을 우등과 열등이라고점수를 매기지 않을 겁니다. 그것 역시 ‘‘서로 다름'‘으로 인정하겠죠. 그건 축복입니다. 아이들 사이에 비생산적이고 불건강한경쟁의식이 싹트지 않은 사회에서,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해서 비교하는 우리 타락한 어른들이 해 줄 일이라곤 되도록 조용히 살다가언젠가 사라져주는 일밖에 없겠지요?


(2007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