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공학박사인 나는 운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내가 토목공학을 공부했어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누구나 오랜 세월을 바쳐 한 우물을 판 특정 테마에서만 전문가일 뿐, 교량전문가라도 하루아침에 운하전문가로 둔갑할 수는없다.

그간 우리나라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뭔가 의견을 보태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못하는 처지가 미안했다. 문득, 그나마 내가독일어는 좀 하니독일의 선례에 대한 정보라도 보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 대운하의 모델이 된다는 독일의 수로교통에 대한 왜곡된정보라도바로잡아드린다면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국민을 ‘‘상식적'‘으로 납득시킬 수 없는 사업은 허점이있는사업이므로 수정, 보완되든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의 전문지식은 일반상식의 범주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그 전문지식을이용해서실행하려는 사업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꾼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주인도 어리석은 주인이고, 일꾼을 뽑았는지 상전을 뽑았는지잊어버리고 맹종하여 상식적인 판단마저 유보하는 주인도 어리석은 주인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주인의 몫으로 돌아온다. 일꾼이야나중에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만이지만 주인은 그 손해의 후유증을 대물림하며 감수해야 한다.

나 역시 친정나라의 주인 노릇을 잘하고자 독일의 뱃길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상식에 기초하여 넓은 범위에서 시작한 조사의반경이어느덧 라인강으로 좁혀졌다. 당연한 일이다. 남쪽의 알프스에서솟아나와 전국토를 가르며 북해까지 이어지는 라인강은 독일에서 수로를 이용한 총물동량의 80퍼센트를소화하고 유럽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수로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즉, 독일 수로교통의 대명사이다.

그런 사실 이외에도 라인강으로 귀결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라인강이 일급 수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천혜의 결과가 아니라사람과 자연 사이의 오랜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즉, 생땅을 파고 물길을 새로 만든 마인-도나우 운하 뿐만 아니라 라인강자체도 인간이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변형시킨 것이다. 차기정부에서 추진하려는 한반도 대운하의 적절한 모델이 아닐 수없다. 한반도 운하의 공사에는 낙동강과 한강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고 물길을 다듬는 수술이 포함되는사실을 볼 때,독일 라인강의 예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이로운 임상실험이 되겠다. 독일인들이 몇 백년의 세월을 두고 벌인 수로사업의 경과와 결과를관찰하여 활용한다면 우리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운하 전반에 대해 넓게 조사하던 나의 촛점이 라인강으로 좁혀진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예전에 나는 라인강을 뱃길로만드는 공사와 그 영향에 대한 조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다. 운하를 건설하는 일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좀알아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찾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전반적으로 운하 건설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주력하기로했다. 나의 좁은지식 하나만으론 이 세상에서 이룩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지식의 범위가 좁더라도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표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정보사회를 따라갈 수 있는 연구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오늘은 라인강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얘기로서 물꼬를 트기로 한다.

30여년 전에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나는 라인강을 낀 도시에 살았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라인강변을 따라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라인강 중류의 강변 산책로는 홍수가 나면 가끔 물에 잠겼다. 첫 데이트도 라인강변에서 했고 고등학교 졸업파티도라인강변의 잔디밭에서 했다. 그때 깜깜한 밤에 수면에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보며 곧 헤어질 친구들과 밤새도록 도란도란 대화하던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내가 대학을 다닌 도시 칼스루에도 라인강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 곳에 강을 끼고 있었다. 나는 토지이용계획을 설계하느라고 라인강 유역의 갈대밭 지역을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갈색으로 유장하게 흐르는 라인강 근처에는 무성하게 서걱이던 갈대밭 사이로 ‘‘옛 라인강의 팔(Altrheinarm)‘‘이라 불리는 라인강의본래 물길이 얌전하게 고여 있었다.

이렇듯 개인적으로 나에게 친근한 라인강은 한국에서도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로 친근한 단어이다. 그런데 정작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이 무슨 소린지 모른다. 몇 년 전에 내가 남편에게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을 했을 때 그는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내 남편이 가진 상식의 범위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러려니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둘 다 고등학교 고학년이니 그간 역사나 지리시간에 배운 것이 아직 머리에남아 있을 것이고 일반상식도 웬만한 어른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질문을 통해서 남편만 모른다는 내 고정관념을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웬걸? 아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모른다'‘였다. 음, 아들은 남편을 닮았으니까. 나는 희망에 찬 눈초리를딸에게로 돌렸다. 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 라인강의 기적? 이차대전 직후에 있었던 라인강의 기적 말이지?”

오오, 역시! 그럼 그렇지! 내 입이 벙긋 벌어졌다.

“독일 축구팀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긴 그 사건 말이지?”

내 얼굴에서 만족한 미소가 퍼지다 말고 딱 정지하는 순간 아들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이, 그건 베른의 기적이지."
“응, 그렇구나. 해해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봉착한 나는 저녁을 먹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로 구글을 두드렸다. 기적, 라인강 이렇게 두단어를 치니 몇 페이지나 주르르 떴다.

연어가 라인강에 다시 서식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제목도 있고, 금발의 클라우디아 쉬퍼가 독일의 브리짓 바르도라나 뭐라나 하면서라인강의기적이라는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아마도 그의 고향이 라인강변에 위치한 모양이었다. 암만 눈을 씼고 보아도 내가 생각하는 라인강의기적은 없었다.

나는 키워드를 ‘‘라인강의 경제 기적'‘이라고 쳐보았다. 그나마 쓸만한 제목을 서너 개 발견했는데 전부 따옴표를 입고 ‘‘한강의 경제기적'‘이란 말과 나란히붙어 있는 걸로 보아 한국의 언어문화에서 파생한 표현이었다. 독일엔 그런 표현이 없다니, 그러면 라인강과 독일의 경제 기적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단 말인가?

‘‘라인강의 기적'‘이란 두 단어로서라인강이 독일의 산업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간결한 서론으로 시작해서, 곧장 라인강의 역사에대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글을 구상한 나는 난감했다. 독일에 그런 표현이 없다면 서론으로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는라인강이 전후의 독일 산업에 정말로 중요한 존재인지부터 제대로조사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이럴 때는 뭔가 내가 바라는 대답이 있다는 걸 잘 아는 식구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어깃장을 놓을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이차대전 직후 독일의 눈부신 경제 부흥은 라인강을 운송수단으로 하는 공업 발전의 덕택이라고 알고 있거든. 너희들은학교에서 뭐라고 배웠어?”

아들은 19세기 말엽부터 눈부시게 발전한 독일의 공업기술이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전후에 부활한 것이라고 말했다.남편은 라인강이 주요 운송수단이었다는 말에고개를 갸우뚱했다. 경제 기적의 원산지인 루르 공업지대의 장점은 주요 산업과 에너지원인 탄전이 집결해 있다는 점인데, 그런 상황에서 교통망이성공의 열쇠로 일컬어질 만큼 그렇게 큰비중을 가졌겠느냐, 설령 그랬더라도 그것이 비단 수로교통, 그것도 라인강 뿐이었겠느냐고 했다. 가족들은 각자 알고 있는토막지식을 이용하여 상식적으로 논리를 폈다. 딸은 내 기억력이 흐려진 건 아닌지, 내가 공부시간에 딴 생각하느라고 잘못 들은 건아닌지 의심했다.

“글쎄, 네가 그렇게 물으니까 나도 자신이 없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런데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어디서 나왔지? 그때는한국과 독일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적었으까 아마도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딸이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엄마, 그럴지도 몰라. 요즘 영어 시간에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읽는데 거기서 독일에 대한 비유에 라인강이 나왔어. 미국에선라인강이 독일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그러니까 독일의 기적이라는 말 대신에 라인강의 기적이라고문학적으로 표현한 걸지도 모르지.”

음, 그렇다면 라인강은 독일의경제기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요즘 한반도 대운하를 라인강의 기적에 비유하는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착각했나?

“이차대전 직후 독일의 주요 운송수단은 뭐였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선박이 아니었을까? 도로도 철로도 폭격 당했으니 남는 건강 밖에 없지 않았을까?”

가족들은 내가 끝까지 라인강에 집착하는 것이 우스운지 능글능글 놀리기나 하고 대답에 성의가 없었다. 이사람들아,다 구상해 놓은 글이 처음부터 어긋나게 생겼는데 미련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러나 단순히 글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어려서부터 그렇게 믿어온 진실, 그것도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믿어온 진실을 뒤집는다는 것은얼마나 마음이 불편한 일인가?

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구글에서 검색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독일의 브리짓 바르도 운운에서 가족들은 박장대소했다.라인강의경제기적과 한강의 경제기적을 비유하는 검색 결과에 대해 얘기하니 남편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20여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 한국에선 경제가 침체된다고 난리였어. 그 해 한국의 경제성장율은 두 자리숫자였어. 독일에서 경제기적을 이루었던 시기에 성장율이 평균 5퍼센트였던 거랑 비교해 봐. 그렇게 찬란한 성장을 그렇게 오래지속적으로 이룬나라는지구상에서 아마 한국이 유일할 거야. 그런 경우는 앞으로도 없을 거야.”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나라에서 앞날을 보고 줄기차게 나가야지 왜 자꾸 뒤돌아 보냐고?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 언제적 이야긴데 그래? 왜라인강이랑 한강을 묶어? 내가 한강이라면억울하겠다. 고속성장은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야. 개발도상국을벗어나서 ‘‘성장의 한계'‘의 반열에 들었음을 깨닫고 거기에 적응하고 대처해야지. 이제는 성장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성장하지 않고잘 살궁리를 해야지. 독일은 지난 30년 동안 호황기에도 성장율 2퍼센트 대를 넘은 적이 없어(3퍼센트 미만이라는 뜻). 그래도평온하게 잘 살고 있잖아? 전후 독일의 경제 기적 수준인 5퍼센트로 성장하면서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나라는 어딘가잘못된 거야. 그것부터 고치지 않으면 더 성장해도 나아지지 않아.”

우리나라 차기 정부에서 추구하는 경제성장율이 7퍼센트라는 말이 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7퍼센트를 고집할 게 아니라5퍼센트로도, 아니 독일처럼 2퍼센트의 성장율만 가지고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이 시점의 정답은 아닐까? 쌀이어디론가 솔솔 새는 밑빠진 독에 7퍼센트가 아니라 14퍼센트의 속도로 퍼부어도 독 안은 여전히 허전할 것이고, 국민은 일꾼이무능하다고 여전히 타박할 것이다.

그러나 독 밑에 난 구멍을 막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간 그 구멍으로 새는 쌀로 재미를 보아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때문이다. 이들은 정경유착의 주인공 몇 명이 아니라 이 나라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는 다수의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해도먹고 살기 어려울 정도 밖에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는 노력 이상으로 편안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한 쌀독 안에존재한다는 소리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분배하는 건 비생산적 모델이지만,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쌀이 새지 못하게 쌀독의 구멍을 막음으로써 쌀독이 점점 차오르도록 하는, 지극히 생산적 모델이다. 생산적 모델의 수혜자는쌀알을 빼앗길가염려했던 중산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다. 그리고 밑으로 새는 구멍을 막아서 안정된 무게를 유지하는 쌀독은 위에서 새로 떨어지는쌀알 몇 톨에 흔들리지 않는다. 쌀독 안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룩한 주인은 구멍을 막아준 일꾼에게 쌀알 몇 톨이 늘었네 줄었네수치로 들먹이며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에서 시작한 대화가 쌀독에 이른 후 우리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늦게까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차대전 직후에는 라인강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미국 영화 ‘‘레마겐의 다리'‘로유명해진 루덴도르프 다리 하나만 빼놓고 라인강의 모든 다리들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그리고 추격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독일군의 폭격으로 강물에 내려앉아 수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직후의 복구사업 기간에 내륙수로교통이 전체 운송물량의 몇 퍼센트를 담당했는지 나는 확실히 알아낼 수 없었다. 30-40퍼센트란 주장이 있기는 한데 출처를 명시하지 않아서 불안하긴 하지만 대략 맞는 말일 것이다. 독일연방 수로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경제부흥이한창이던 1960년에 독일 전체 운송물량의 3분의 1을 수로교통이 담당했다. 그리고 이 그래프에 의하면 독일의 내륙수로를 통과한물량(초록색)은 1960년 이후로 거의 증가하지 않아서 1998년에 독일 전체 물량 3800억 톤킬로미터(tkm)의 13퍼센트인500억 톤킬로미터(tkm)를 기록했다. (링크: 화물운송량)

역시 독일연방 수로국의 통계자료인 다른 그래프에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각 운송수단의 비율이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내륙수로를이용한 화물운송의 비율은 전체의 14퍼센트가 안 되는 수준에서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2006년의 내륙수로비율은12퍼센트이다. (링크: 운송수단의 비율)

일목요연하게 정보만 나열하려던 글이 ‘‘라인강의 기적'‘에 막혀 첫 문장부터 흔들렸다. 큰 가지만 밟으며 확확 건너뛰지 못하고잔가지부터 꿰맞추고 있으니 나도 출세하긴 틀렸다. 하지만 큰 가지만 밟으며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나처럼 잔가지하나씩만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더 유익한 ‘‘인적자원'‘이라는 자부심에 넘쳐서 애초에 한 줄로 계획했던서론을 마친다.




참고자료

링크: 화물운송량
출처: 독일연방 수로국 공식자료
세로축의 단위는 10억 톤킬로미터 (Mrd.tkm)
가로축은 년도(1998년부터는 도로교통 부문에서 근거리와 원거리를 구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집계했으므로 이 통계자료는 그 시점에서멈춤.)
하늘색: 파이프라인
고동색: 도로 (1990/91년에 수치가 뛴 것은 도로교통 부문에서 집계방식의 변화에 따른 것임.)
파란색: 철로
초록색: 내륙수로

링크: 운송수단의 비율
출처: 독일연방 수로국 공식자료
분홍색: 파이프라인
쑥색: 도로
연두색: 철로
파란색: 내륙수로

링크:독일연방교통건설부 보고서
독일연방 교통건설부에서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유럽내에서 독일 내륙수로교통의 경쟁력에 대한 보고서

링크: SWR교육방송, 도인강의 수로교정
링크: 위키페디아,라인강의 수로교정
링크: 위키페디아,경제성장


이 글은 2008.1.30일자 인터넷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링크: 인터넷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