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유모차 앞에서 알통자랑
“어린이 놀이터를 만드는 것은 어린이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70년 대에 칼스루에 대학 건축과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할때 들은 말이다.
어린이들이 노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준다는 말은, 어린이는 놀이터 이외의 땅에서는 놀 수 없다는 뜻이고, 놀이터안에 고립되어서만 어린이다울 권리가 있는 어린이는 그 도시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70년대에 독일에선 자동차가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도로도 주택지도 전부 자동차가 다니기 편리하게 지어졌고, 그때부터어린이들은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로 찍혀 ‘‘어린이 전용구역'‘인 놀이터 안에 갖히는 신세가 되었다. 한창 산만할 나이의꼬마들을 데리고 거리를 걷자면, 개목걸이라도 해서 묶고 싶을 만큼 아이들은 도시의 방해자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그냥 아이들답게 행동할 뿐인데도, 집안과 놀이터만 벗어나면 각종 사고의 원인제공자로 돌변한다. 아이들은 놀이터로나 가라고, 또아이들 단속을 잘하라고 보호자를 윽박지르는 시민들은 법적으로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상식에 근거한 고유한 사고를 반납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집회 전용구역'‘을 만든다고 한다. 일단 전용구역이 생기면 그 구역 외에서의 행사는 범법행위가 된다. 탄압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데모는 원래 남이 보라고 하는 것인데, 전용구역 안으로 격리시킨다는 말은 데모를하지 말란 뜻이다. 집회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인 동시에 국민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자유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다.
코딱지만한 놀이터를 만들어줬다는 핑계로 도시 전체를 어린이가 안전하게 다닐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고도 죄의식이 없는 사회는어린이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다. ‘‘집회 전용구역'‘이라는 모순적인 단어가 존재하는 나라는 국민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나라다. 세상에 기본권을 박탈당한 주인이 있을 수 있나? 안 그래도 중국이 올림픽 기간 동안 ‘‘집회 전용구역'‘이란 걸 만들어서세계인의 비웃음을 샀는데, 한국 정부에서 마치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이 잽싸게 따라하겠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따로 없다.
자식의 미래가 달린 사안, 주부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에 주부가 유모차를 끌고 나와 데모를 하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 어디있을까? 유모차가 교통에 지장을 줬다는 죄목도 우습고, 아동학대죄라면 더욱 우습다. 정부에선 국제적인 망신을 무릅쓰고라도 한사람씩 각개격파로 겁을 줘서 미래의 데모를 막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발상이다. 우리 국민은 이미 그런 식으로지배받는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다. 몇십 년 전에 가능했다고 해서 아직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나라일을 할 자격은 없다. 세계적인 경쟁의 시대에 그렇게 상상력이 없어서야…
촛불의 기세가 사그러지고 수습국면으로 들어선 지금, 정부에선 왜 갑자기 알통 자랑을 하는지 괴상하기 짝이 없다. 낙하산 인사와방송장악을 통해 그동안 충분히 근육을 불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정부는 국민을 동반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대상'‘으로 본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다. 평범하게 살면서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서까지 오해를 받아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면 대체 누구에게 이익이 된단 말인가?
독일에 ‘‘글라이히샬퉁(Gleichschaltung)‘‘이란 단어가 있다. ‘‘전체적 획일화'‘라고 번역할 수 있고, 우리 식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전체적 코드인사’’ 또는 ‘‘낙하산 인사'‘라고 하면 뜻이 통할 듯하다. 독일인들은 이 단어를 들으면 경각심에서 귀를 쫑긋한다. 나치 시대에 독재의 서막을 열었던현상이기 때문이다. 훗날 독일 국민은 이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반성했다. 행여 비슷한 일이 일어날라치면 국민들이 대번에알아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뮌헨시에선 ‘‘뮌헨에서의 나치주의'‘라는 소책자를 발간해서 뮌헨 주민과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히틀러의 정치적 요람인뮌헨에서 나치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답사할 수 있도록 만든 안내서이다. 거기엔 뮌헨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꼭 들르는 신청사의입구에 걸린 현판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뮌헨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이 현판은 “희생자들에 대한 뮌헨 주민의 애도과부끄러움, 그 당시 자신들의 침묵에 대한 경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안내서는 쓰고 있다.
이 안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적범죄의 공범이 되는 과정, 즉 사회가 점차 나치화되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 시초는 ‘‘글라이히샬퉁 - 전체적 코드인사'‘였다고 설명한다. “경찰, 사법부, 행정부, 사적인 단체, 언론, 각종 협회를 망라하는 ‘‘전체적 코드인사'‘는 독재가 장기적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는 기반이 되었다. 법관과 공무원은 임의로 임용되거나 해고될 수 있었고, 다수의나치당원들이 사회의 고위직을 장악했다.”
굳이 남의 나라의 경험에서 배울 것도 없이,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20년 전까지는 독재가 일상사였다. 내가 갈래머리 소녀였던 유신시절에, 세사람인가 네 사람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한 긴급조치 때문에 고등학생 문학클럽에 참석하는 일로 부모님과 싱갱이를 한 경험이 있다.그때 이웃집 아저씨는 술김에 택시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서 3년 만에 돌아온 후로 정말 아무 말도 안하고 살았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선 이런 억울함을 알려주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정세를 판단하고 경고하는 기준이된다. 그래서 한국 국민이라면 ‘‘집회 전용구역'‘이란 소리에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다.
낙하산 인사가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언론계와 사법계가 자유롭지 못한 조짐이 보이면 삐리릭경고음이 울려야 성숙하고 건강한 사회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종식시킨 한국 사회는 대단히 성숙하고, 인터넷 강국이기에 대단히건강하다. 백령도에서 설악산, 제주도까지 고속인터넷이 깔려 국민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있고, 국외의 방방곡곡에선 이중언어와이중문화에 익숙한 동포들이 실시간으로 접속하고 있다.
이렇게 성숙하고 건강한 국민들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낙인 찍어 힘겨루기를 하는 지도자야말로 어쩌면 ‘‘전체적 코드 인사'‘의진정한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똑같은 색깔의 색안경을 쓰고 항상 “예스 써!“를 합창하는 단체 안에서는사실을 사실대로 보기도 힘들고, 설령 제대로 봤더라도 코드가 다르다고 의심받을까봐 사실대로 말해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의상식이 통하는 단체에서라면, 유모차를 놓고 국민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불리한 사업인지를 얘기해줄 사람이 분명히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히 어려운 시기에 나라 살림을 맡았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에너지파동과 금융위기는 지금 우리나라 뿐아니라 어느 나라도 다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다. 우리 정부가 그간 얼마나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이런 일에 대처했는지를 물을수는 있지만, 이제 갓 출범한 정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국민들이 현 정부에 거는 기대가비현실적이고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경제 공약을 걸고 당선된 대통령이긴 하지만, 세계의 시장이 변했다는 사실은 감안해주어야할 것이다. 세계 시장이 변할 줄 몰랐었는냐, 세계 시장이 변하지 않았더라도 불가능했을 공약이 아니었느냐고 다툴 수는 있지만,지금 누가 정권을 잡았어도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적응하기 위해서 정부는 747 경제공약의 강박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고, 국민은 이를 이해하고 격려해줘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고속성장이 불가능한 시기에는, 목표를 좀 낮게 선정하고 그 대신 내실을 다지는 정책으로 코스를 수정하는 노련함을 정부에 기대하고싶다. 교육, 노동, 환경 등 우리가 그간 성장하느라고 소홀히 했던, 그러나 계속 성장하려면 언젠가는 필히 해결해야만 할 일들이무궁무진하게 쌓여 있다.
그런데 내실을 다지는 정책은 그 효과가 숫자로 나타나는 일이 아니어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전폭적인 믿음이 꼭 필요하다. 성숙한국민은 정부를 믿고 밀어주기 전에 확실한 담보를 요구한다. 나의 양보와 지지가 특정 소수의 배를 불리는 일에 악용되지 않는다는보장을, 그리고 나중에 나의 인권을 옥죄는 독재를 만드는 일에 악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국민은 요구한다. 부정과 독재를 감시하는기구는 언론이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국민이 국가를 믿어줄 리 없다. 독재를 경험한 적이 있는 우리 국민은독재의 조짐에 대단히 민감하다. 현재 국민들이 가장 크게 의심을 눈초리를 날리는 독재의 조짐은 종횡무진한 낙하산 인사, 그리고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이다.
정부는 국민에게 이런 의심을 풀어주려는 선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서로 의심하는 부부는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 더욱 사이가나빠져서 같이 망하는 길도 서슴없이 가지만, 서로 믿어주는 부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전화위복의 수를이루기도 한다. 서로 믿으며 다같이 공평하게 간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국민은 허리띠 졸라매고도 어깨동무 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언덕을 넘을 혈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정부는 이 엄청난 잠재력을활용하여 공생하고자 하는 선의를 보여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