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자 글의 연속입니다.

자전거를 잘 만드는 남자 (1995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흘째 되는 평온한 일요일 아침에 경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이다. 도난신고 된 우리 자전거와 트레일러가 멀리 떨어진 주택가에서 발견되어 신고가 들어왔는데 좀 망가진 상태이긴 하지만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부리나케 쫓아간 남편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 어렵사리 끌고 오는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보는 순간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좀 망가진 게 아니라 아주 고물이 되어 있었다. 마치 자식이 밖에 나가서 엉망으로 얻어맞고 불구가 되어 들어왔을 때의 어미 심정이 이럴까?

잃어버린 사실까지는 극복하고 평화로운 심정으로 돌아갔던 내 마음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없어서 얼른 외면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작정하고 재미로 때려부순 이것들을 우리가 여케까지 소중하게 다루었던 기억이 어른거렸다.

나는 이리저리 점검하고 있는 남편이 고치기를 포기하고 그냥 깨끗이 갖다버리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일이 바쁘다며 일분 일초도 내지 못할 것 같던 남편이 열일을 젖혀두고 하루종일 매달리더니 먼저 자전거를 원상태로 감쪽같이 고쳐놓았다. 몇가지 새로 갈은 부속 덕분에 오히려 더 말끔하게 반짝이는 내 자전거는 저 자신도 흉칙한 기억을 깨끗이 씻어버린 듯 싶었다.

트레일러는 더욱 상해 있었으므로 전부 해체해서 거의 새로 만드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남편은 무참하게 찢어지고 더러워진 나일론천의 수리를 잔인하게도 내게 일임하였다. 나도 어른인데 내 감정만 내세워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나는 이를 악물고 걸레처럼 더러워진 천을 욕조에 쳐박았다.

비누거품을 듬뿍 내서 수세미로 닦아내는데 평소에 우리가 묻혔던 우리의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생판 모르는 도둑놈에 의한 더러움과 상처는 불결함을 넘어 진저리치는 불쾌감을 야기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수세미질 때문에 천이 닳아서 더 상할 정도로 힘을 주어 박박 밀어내는 마음속에는 이 끔찍한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겠다는 오직 한가지 집념밖에 없었다. 간간이 잘 안 지워질 때는 그냥 다 갖다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때 엉뚱한 비유가 생각냈다. 옛날 우리나라에 사회, 정치적으로 흉흉하던 시절에 세칭 가정파괴범이라는 강도들이 날뛰었는데, 이들은 금품을 턴 후에 주인집 주부를 강간함으로써 경찰에 신고를 포기하도록 하는 지능범들이었다. 희생자들의 가정은 정말로 그러한 강간사건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나는 그당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머저리같은 남편들이 괘씸해서 펄펄 뛰었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옆에 있었으면서 지켜주지도 못한 주제에, 상처 입은 부인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이혼을 해? 폭행을 당한 것만도 억울한데 가장 의지가 되어야할 동반자로부터 도리어 버림받는 여자들이 한없이 불쌍했다. 그녀들은 최소한 남편이 길 가다가 깡패에게 맞고 들어왔다고 해서 기분 나빠서 이혼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강도, 강간범에게 가정파괴범이라는 해괴한 명칭까지 붙여줌으로써 사실상 제 가정을 포기한 남편의 책임까지 전가해주는 사회, 그런 비겁한 못난이들이 정상인으로 버젓히 행세하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통탄스러웠다.

그래, 바로 이 감정인가 보다.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해마지않던 예의 그 남편들의 심정이. 이렇게 닳도록 수세미로 문질러서 가슴 아픈 흔적을 지워버리지 못하면 그 충격을 감당할 힘이 없어서, 차라리 몽땅 다 갖다버리고나서 아예 잊는 쪽을 택하고 싶은 심약하고도 인간적인 고뇌가 잠시 감지되었다. 그 감정의 색깔은 이해되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인간상이 전혀 용납되지는 않았다. 자전거 한번 도둑맞으면서 느끼고 배운 것도 많았다.

이처럼 우리 가정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자전거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장학퀴즈의 정답은 독일의 드리이스트 남작(Freiherr von Draist)이다. 그가 1817년에 드라이지네(Draisine)라고 이름 붙여 특허를 낸, 발로 땅을 밀어 달리는 기구가 자전거의 시조라는 것이 정설이다.

[각주\1 이 드라이지네의 원형을 실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우리 동네 Werderstr. 63의교통박물관(Verkehrsmuseum)을 방문하실 것을 권한다. 여기에는 자전거, 자동차, 기차 등 모든 탈것들이 원형으로 또는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가볼 만한 곳이다. 특히 맨 위층의 모형기차 전시실에는 미니기차(Modelleisenbahn)들이 회원들의 정성어린 투자와 봉사로 눈 돌아가도록 재미있게 꾸며져 있다. 독일 제일의 규모라고 한다. 박물관은 매주 수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에만 문을 열고, 입장료는 2-3마르크 선이다. 모형기차 전시실은 일요일오전에만 문을 연다. Europaplatz의 Breuninger백화점 뒤에 위치한 Prinz Max Palais 2층의 도시역사박물관(Stadtgeschichte Museum)에도 드라이지네가 전시되어 있다.이 박물관에서는 1830년대 칼스루에 도시의 대형모형이 볼 만하다. 불과 170년 전의 이 도시를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우리 환경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것이 눈에보이는 듯하다. ]

그는 공교롭게도 우리 칼스루에 출신이다. 우리 동네에 관한 상식을 소개하는 의미에서 한마음지 이번호의 표지로 드라이지네를 제안했다. 표지 그림은 특허청에 제출한 드라이지네의 모형도이다. 현존하는 자전거의 도면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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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도 목마에 바퀴를 달은 형상의 밀것이 있었지만 속도도 느렸고 방향조정이 불가능해 자전거라기보다는 장난감에 더 가까웠다. 세계 최초로 방향조절이 가능한 드라이지네는 시속 15km의 속도를 냈고, 이것은 그 당시의 우편마차보다 네 배나 빨라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최초의 자전거라고 단정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자전거는 백여 년을 거쳐 세계 각국의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기구이기 때문에 과연 어디서부터 자전거로 정의하느냔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저전거 경보기를 개발한 일이 있는데, 선전문구에 ‘‘최초로 자전거를 탄생시킨 도시 칼스루에에서 이번에는 최초의 자전거 지능경보기가 발명되었다'‘라는 귀절을 읽은 스코트랜드의 한 회사로부터 정중한 항의편지를 받았다.

세계 최초의 자전거는 스코트랜드의 대장장이 맥밀란(Macmillan)이 1838년에 발명한, 두 발로 번갈아 밀어대는 페달을사용하여 뒷바퀴를 돌리는 자전거라고 정의함이 옳고, 그 이유는 첫째, 오늘의 자전거가 그 원리를 정통으로 이어받았고 둘째, 그이전의 것들은 자전거라고 부르기가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아까 장학퀴즈의 정답이라고 말했듯이 큰 흐름으로 보아 대답한다면 드라이지네가 일반적으로 최초의 자전거로 통한다.

그러면 드라이스트 남작은 누구인가? 1785년에 칼스루에에서 귀족의 신분으로 태어나 최상류의 교육을 받으며 유복한 소년시절을보냈다. 20대 초반에 삼림감독관에 임명되는 등 모든 조건으로 보아 전도가 양양한 청년이었으나, 현실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대신에 테크닉에 미쳐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이 발명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드라이지네 이외에도 타자기, 속기기, 대포 등을 고안했는데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수학에서 숫자 두 개를 이용한계산법이다. 몇십 년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전신기술 모르스 부호와 오늘날 컴퓨터의 원리가 되는 이진법을 사용한 계산법들은 인류의 대발명에 속하는데, 이들은 바로 이 드라이스트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구체화시킨 것이다. 드라이스트의 가장 큰 결점은, 대부분의 발명가가 그렇듯이, 그의 생각이 너무나도 시대를 앞서 갔다는 데 있다.

그의 발명품 중에서 유일하게 사업성이 있었던 드라이지네의 대량생산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유사품에 밀려서 수포로 돌아가고, 드라이지네는 유명해졌지만 정작 발명가에게 실질적인 이윤은 가져다주지 못했다. 본래의 직업을 소홀히하여 이미 정부의 눈밖에 나았던 그는, 어느날 그의 작품을 비웃는 영국인과 주먹다짐을 벌인 후 귀족사회에서 정식으로 소외되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며드라이지네 쇼로 연명했던 그는 1851년 칼스루에 Zähringerstraße의 하숙집에서 쓸쓸하고 가난한 말년을 마쳤다.

자전거의 역사를 간단히 훑어보자면 1817년에 드라이지네가 특허를 받자, 이것을 기초로 하는 많은 발명품들이 유럽 각국과 영국에서 뒤를 따랐다. 이들은 발로 땅을 차며 앞으로 굴러가는 대신에, 손이나 발로 페달을 밀거나 당겨서 바퀴에 힘을 전달하는방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위에서 말한 스코트랜드의 자존심 맥밀란이 여기에 속한다.

1853년에 영국의 악기 제조공인 피셔(Fischer)에 의해 비로소 페달을 발로 돌려서 굴러가는 자전거가 탄생되었다. 피셔의 자전거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여러 발명가들을 통해 높은 자전거(Hochrad)로 발전되어갔다. 페달이 앞바퀴에 달렸고 페달을 한번 돌릴 때마다 바퀴가 한 바퀴씩 돌아갔으므로, 한 번 페달을 밟을 때마다 되도록 많이 나가기 위해서 앞바퀴가 무지무지하게 크고그 덕분에 안장이 까마득하게 높은, 우리가 그림에서 많이 보아온 자전거가 바로 그것이다. 높은 자전거는 타기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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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은 자전거 역사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해다. 프랑스인 미쇼(Michaux)에 의해 처음으로 파리의 큰 공장에서 자전거가대량생산 되기 시작했고, 세계 자전거박람회도 열려서 유럽과 미국의 최신형 모델들이 앞을 다투어 선을 보였다. 이때 지금과 같이뒷바퀴에 회전페달을 연결한 자전거가 처음으로 시장에 나왔다.

1888년 스코트랜드의 가축병원 의사 던로프가 공기 타이어를 발명하면서부터 자전거의 발전은 성공일로로 치달아, 1900년에독일인 작스(Sachs)에 의해 페달을 항상 돌리지 않아도 관성에 의해 바퀴가 계속 돌아가면서 쉽게 굴러가는 토르페도타성축(Torpedo-Freilaufnabe)이 발명되면서 현대 자전거의 양상에 도달하였다.

독일의 작스 사는 오늘에도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 중 뒷바퀴 타성축은 단연 으뜸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그외에도 일본의시마노 사가 전체 자전거 부품시장의 칠팔십 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 시장점유율은 이보다 훨씬 낮지만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회사는 이태리의 캄파니올로(Campaniolo)이다. 고가격, 고품질, 고상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며 이 회사 제품으로 만든자전거는 해마다 세계 자전거 경주에서 석권하곤 한다. 자전거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은 캄파니올로 부품을 선호하고, 지나가다가도 이회사 제품을 어딘가에 조립한 자전거를 용케도 알아보곤 한다.

이왕이면 실용적인 자전거 상식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자전거는 바퀴의 지름길이에 따라 26쫄(Zoll), 28쫄, 이렇게부르는데 쫄은 인치(Inch)다. 보통 독일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가장 큰 28쫄짜리 자전거를 탄다. 바퀴가 크다고 다리가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페달과 안장 사이의 길이가 짧은 28쫄짜리 자전거도 있고, 바퀴는 더 작아도 페달과 안장 사이가 많이길어서 키가 작은 사람은 타기 어려운 것도 있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과 나의 자전거는 둘 다 28쫄 짜리다. 그래서자전거를 구입할 때는 꼭 올라타봐야 한다.

페달과 안장 사이의 길이는 페달이 가장 밑으로 왔을 때 무릎이 쭉 펴지면 너무 긴 것이다. 오래 타면 관절에 무리를 주므로안장을 내릴 여지가 있으면 낮춰주어야 한다. 다리를 가장 길게 뻗었을 때 무릎이 살짝 구부려진 듯한 것이 이상적이다. 또한 안장을 너무 내려서 무릎이 항상 꺾여 있어도 좋지 않다.

핸들을 잡고 자전거 위에 앉았을 때 꼿꼿하게 앉은 자세면 주행진동이 전부 척추로 가서 충격을 준다.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야만핸들이 잡아지면 체중이 팔에도 실리기 때문에 진동이 척추와 양팔로 분산되어 무리가 줄어든다. 그러나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나의경우를 보면,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에서 오래 자전거를 타면 소변 볼 때 쓰라리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 등을 구부려서 허래아래는 안장과 직각이 되게 앉곤 한다. 물론 이것이 더 나쁜 자세이기 때문에 핸들의 높이를 올려서 아예 똑바로 앉아서 타고있다.

몇 주씩 걸리는 자전거 여행 후에 손가락이 마비되는 현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핸들의 모양과 잡는 자세, 힘의 불균형한분산이 그 원인인데,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 자전거 잡지를 보면 어떤 모양의 핸들에서 이런 현상이 잦다는주장들이 가끔씩 나오는데, 체계적인 조사를 거친 통계가 아니므로 각자 경험에 의해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다.

자전거를 타고나서 엉덩이가 아프면 안장을 다른 모델로 바꾸면 감쪽같이 해결되는 수가 있다. 안장이 체격에 맞지 않으면 엉덩이가아프다. 안장도 남녀용으로 나뉘어서 여러가지 모양과 종류가 있으며, 엉덩이살이 빈약한 편인 우리 경우를 보면 비싼 가죽안장은딱딱하여 불편하였고, 값이 싼 편에 속하는 플라스틱 안장 중에서 알맞는 모델을 찾을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햇살 따스한 봄이 오면 하루쯤 날을 잡아서 우리집 마당에서 자전거 정비와 수리 잔치를 벌일 계획이다. 자전거가고장나서 고치고 싶거나, 자전거를 타기 좋은 계절을 맞아 전반적인 점검과 정비를 원하는 분들은 그날 우리집에 들르시기를 권한다.자전거 수리에 필요한 공구는 거의 다 갖춰져 있고 기술자가 기꺼이 점검하고 수리를 도와드릴 것이다. 단, 함께 작업함으로써자전거의 수리 방법을 직접 배우시라는 의도이기 때문에 자기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케이크를 암만 많이 싸들고 와야소용이 없음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자동차를 팔아치운 사람이 오면 우리 남편은 기분이 좋아서 서비스가 대단히 극진할지도 모른다. 평소에 남자유의 존중을 핑계삼아 자기 소신에 대한 용기가 부족해 보여서 은근히 불만을 품었던 마누라에 대해 미안한 마음까지 보태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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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그 후로 14년이 흐른 오늘날, 남편은 아주 아주 쪼끔 순해졌습니다. 요즘은 아이들 교육 분야에 치중하느라고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습니다만 스스로는 여전히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희집 근처에 있는 신호등은 자동차가 와서 서면 그때서야 파란불로 바뀝니다. 자전거가 오면 센서가 감지하고 못해서 늘 빨간불이지요. 그래저는 자전거를 타고갈 때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남편은 이를 개선하려고 지금 6개월 이상을 뮌헨 시의 도로 담당자연락을 주고 받는 중입니다. 그냥 항의만 하는 게 아니라 분초를 재어가며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아래 동영상은 시에서 몇번의 개선 시도 후에 완전하게 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증거 자료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시정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투쟁이 아니라 협력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상을 주기로 몰래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 남편이 뭐 잘못해도 10번은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링크: 동영상(자전거만으로는 파란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라서 볼 것은 없지만 모델이 멋있음^^)